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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잊혀진 발해의 역사를 저술한 조선의 실학자, 유득공

2013-01-24

잊혀진 발해의 역사를 저술한 조선의 실학자, 유득공
<발해고>로 잃어버린 제국을 깨우다


조선 정조 8년 쓰인 <발해고(渤海考)> 서문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부여 씨(백제)가 망하고 고 씨(고구려)가 망하자
김 씨(신라)가 그 남쪽 땅을 차지했고
대 씨(발해 시조 대조영)가 북쪽을 영유해 발해라 했으니,
마땅히 남ㆍ북 국사가 있어야 함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저자인 김부식(金富軾)이
1145년, 한국 최초로 고대의 역사를 구성한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쓰면서
삼국시대→통일신라→고려시대로 고착시킨 국사관을
삼국시대→남북국시대→고려시대로 확대한 이 사관(史觀)은
한국 사학사계를 뒤흔들었다.

698년, 고구려의 장수였던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을 거느리고 동모산에 도읍해서 세운 발해(渤海)는
동북 아시아 만주지역에서 229년간 유지되며
통일신라와 함께 한국 역사에 남북국 시대를 열었지만
926년, 거란의 황제 ‘야율아보지’의 공격으로 멸망한 뒤
역사에서도 사라잔 제국이었는데,
잃어버린 영토와 그 역사 찾기를 주장하면서
한민족의 역사 무대를 발해의 영역이었던 만주 일대로 확장한
최초의 저서가 등장한 것이다.

실제로 <발해고>가 쓰여진 후, 발해 역사를 되살리는 노력들이 이어졌으니
오늘은 <발해고>의 저자인 유득공(柳得恭)에 대해 알아보자.

학문의 토대를 쌓다

1748년 음력 11월 5일 태어난 유득공은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신분상 서자로 살아야 했다.
게다가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부친마저 여의었으므로
유득공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처지였다.

하지만 유득공의 어머니, 홍씨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실천한 강한 여성이었다.
28살에 갑작스레 과부가 됐지만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아들의 공부를 위해서 서울로 올라왔고,
고관들이 많이 사는 서울 경행방(지금의 종로구 경운동)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아들의 학업을 이어갔다.

어머니의 극진한 정성 속에 학문을 쌓아가던 유득공은
'기하(幾何)'를 호로 사용할 정도로 수학과 천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는
숙부 유련(柳璉)의 영향으로 실학에 눈을 뜨고,
20세를 전후로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와 같은
북학파(北學派, 청나라의 발달한 문물 수용을 주장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인사들과
교유하며 '백탑동인(白塔同人)'이라는 시동인회(詩同人會)를 결성했다.

이 때부터 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유득공은 25세 때,
기자(箕子)에서 후백제까지 쓰여진 우리나라의 한시를 모아
<동시맹(東詩萌)>을 엮으며 역사를 바탕으로 한 서사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1773년에는 박지원, 이덕무와 함께
개성, 평양, 백제의 도읍지인 공주를 다녀오면서 역사지리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이 여행은 5년 후, 단군조선의 왕검성에서 고려의 개성에 이르는
21개의 왕도를 칠언절구로 읊은 민족 서사시,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의 토대가 되었다.

역사를 되살린 역사가로서 큰 족적을 남기다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있었던 유득공은
177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779년, 박제가, 이덕무,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돼
문신들이 매월 강(講)을 할 때, 왕과 신하들 사이에 논의되는 내용을 기록하고,
문서를 필사하는 업무를 맡았다.

정조의 배려와 시대적 분위기로 서얼출신이라는 신분 제약에서 벗어난 유득공은
포천현감(抱川縣監), 양근군수(楊根郡守) 등 지방관을 역임하고
북경(北京) 두 번, 심양(瀋陽) 한 번 등 중국에도 세 차례나 파견돼
상상만 했던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의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을
직접 가 보는 기회를 얻었다.
이는 물론 훗날(1784년) 그가 <발해고>를 쓰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북학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1801년(순조 원년) 풍천부사에서 물러난 유득공은 칩거하며 저술에만 몰두했는데,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동서고금의 문학을 섭렵한 그는
한국의 세시풍속을 최초로 기록해서 조신시대 풍속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경도잡지(京都雜志)>, 고대 역사지리서 <사군지(四郡志)> 등
민족의 주체 의식을 되새겨 보는 명작을 남기니
그는 비록 1807년, 6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만
한국 역사에 대한 유득공의 바른 관심은
정약용(丁若鏞)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가 나올 수 있는 소주한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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