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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한국 창작춤의 선구자 김매자

2016-11-22

‘창무회’는 창작무용연구회의 준말로 한국 전통춤을 바탕으로 다양한 예술 분야를 접목시켜 새로운 느낌의 춤으로 재탄생시킨 창작 무용을 발전시켜온 중심 모임이다.
40년 동안 한국 무용을 성장시켜온 그 중심에 김매자가 있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정열적인 춤으로 한국 창작춤을 이끌고 있는 김매자의 삶을 소개한다.



창무회 창작춤 40주년 기념 공연
지난 10월 4일 , 한국 창작춤 40주년을 기념하는 ‘창무큰춤판’이 벌어졌다.
40년 동안 한국창작춤을 주도한 창무회를 거쳐간 수 많은 안무가들, 지금은 한국 무용계를 이끌고 있는 분들의 춤 세계를 조명하는 의미 있는 공연이다.
‘창무큰춤판’은 12월 말까지 서울 창천동 포스트 극장에서 창무회를 거친 안무가 20명이 24차례 공연을 펼친다.

한국 창작춤의 대모 김매자
한국 무용계에서는 김매자를 한국 창작춤의 대모라고 부른다.
1970년대 과감히 버선을 벗고 맨 발로 무대에 올랐고 1985년에는 아시안 최초로 미국 최고 댄스 잡지인 ‘댄스매거진’ 표지 모델이 됐다. 한국과 러시아 수교 전에 벌써 상스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무대에 섰다.
2006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꿈의 무대로 불리는 프랑스 리옹 ‘메종 드라 당스’ 에 초청되기도 했다. 2011년에는 일본교토조형예술대학에서 김매자를 집중 연구하는 심포지엄도 열렸다. 김매자는 70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열정적인 현역 활동을 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춤꾼 자질 보여
북한 태생인 김매자는 한국 전쟁 때 외삼촌이 있는 강원도 영월로 피난와 그곳에서 자랐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춤은 김매자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어릴 땐 그저 춤이 좋아 추곤했다. 중학교에 가면서 창극에 빠져 창극을 배웠고 부산 최초의 국악 교육장이었던 ‘민속무용연구소’에서 3년 동안 춤과 연기를 배웠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부산의 한 극장에서 첫 공연도 했다. 현대무용가 황무봉 선생 아래 현대 무용도 배우면 무용가의 길을 걸었다.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한 후 1972년 모교인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가 됐다.

한국 전통춤 이론 확립 위해 창무회 설립
1976년, 한국춤에 이론이 정립되지 않은 점을 안타까워하던 김매자는 ‘창작무용연구회’-창무회‘를 설립했다.
전통춤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전통춤을 보다 깊이 연구하고 이론을 확립하면서 그 위에 새로운 것들을 결합해 창작춤을 만들어 가는 노력을 하자는 의미에서 설립됐다. 창무회 입단 자격 심사는 까다로웠다. 석사 과정에서 전통무용에 관한 논문이 통과된 자만 창무회에 들어올 수 있었다.
또 실기 능력도 자기 창작을 할 수 있는 기본 실력이 있는 사람만 입회 자격을 얻었다. 유능한 무용가들이 모여 한국 무용의 새로운 방향을 향해 머리를 맞댔다.
지난 40년 동안 창무회는 한국 무용의 이론을 정립하고 또 발전시켜 나온 큰 역할을 해왔다.

한국 춤 발전 위해 헌신
김매자는 전통 춤을 바탕으로 한국 무용을 발전시키자는 취지로 모인 창무회를 중심으로 부단히 헌신적인 노력을 해왔다. 1992년에는 자신의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7층짜리 건물을 세웠다. 창무회를 위한 공간이었다.
무용도서관, 모노드라마 스튜디오, 전문 교육시설, 연습실로 구성된 이 건물은 창무회 발전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 김매자는 한국 창작 무용을 세계에 알리는 노력도 부단히 해왔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무대에서 보여주는 김매자의 창작춤에 담긴 열정은 관객들을 환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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