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경환이가 하기 휴가를 하고 서울서 집에 왔다.
그러나 전보다 얼굴빛이 희어지고 바지통이 넓은 양복에
흰 테두리 한 모자를 멋있게 쓴 것이 달라졌을 뿐,
서울이 얼마나 좋고 자기 다니는 학교가 얼마나 훌륭한 곳인가를 자랑하는 것과
또는 활동사진 배우 중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쩌고,
그리고 잡된 유행가를 부르며
동네 어린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나비는 잡는 것이 일이었다.
바우는 그 꼴이 곱게 보일 수 없었다.
- 방송 내용 중 일부
“인마, 눈 없어! 넌 남의 집 농사 결딴내두 상관없니?”
“우리 집 땅 내가 밟았기로 무슨 상관이야?”
“우리 집 땅?
땅은 너이 집 거라두 참외 넝쿨은 우리 집 거잖아.
우리 집 참외 넝쿨을 결딴내니까 그렇지”
“너이 집 참외 넝쿨은 그렇게 소중히 알면서,
어째 남의 나비 잡는 건 훼방을 놓는 거냐? 나두 장난으로 잡는 건 아냐”
“장난이 아닌지도 몰라도 넌 나비를 잡는 거고
우리 집 참외 넝쿨은 거기서 양식도 팔고 그래야 헐 것이거든.
그래, 나비가 중하냐, 사람 사는 게 중하냐?”
“나두 거기 학교 성적이 달린 거야.
너이 집 집안 살림을 내가 알게 뭐냐?”
“뭐 인마? 그래서 남의 참외밭을 결딴 내는 거냐?
나빈 우리집 참외밭에만 있구, 다른 덴 없어?”
# 인터뷰. 방민호 문학평론가
이 소설은 농촌의 계급 문제를 소년의 시각으로 그린 소설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경환이 아버지는 마름이에요. 그리고 바우의 아버지는 소작농이에요. 그러니까 이 소작농에게 논을 나눠줄 것이냐 말 것이냐라는 것을 그 지주에게 진언을 할 수 있는 그런 계급이 마름이잖아요. 경환이네는 마름의 자식으로서 또 논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바우에게 야 이거 우리 땅이야 라고 얘기하고 근데 넝쿨은 우리 거야 라고 바우가 얘기하는 그 참 웃지 못할 광경을 통해서 농촌에서의 계급 문제가 어떻게 이 소년들의 시선, 처지에 투영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바우는 산을 내려와 맞은 편 언덕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서 메밀밭을 내려다 보았을 때
그는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환이 집 머슴으로 본 사람은 남 아닌 바로 자기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모자를 벗어 들고 나비를 쫓아 엎드렸다 일어섰다 하며
그 똑똑지 못한 걸음으로 밭두덩을 지척지척 돌고 있다.
바우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하니 아래를 바라보고 섰다.
그러다가 갑자기 언덕 모래 비탈을 지르르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버지가 무척 불쌍하고 정답고
아버지를 위하여서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든지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바우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마음을 가슴 가득히 참으며
언덕 아래 메밀밭을 향해 소리쳤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작가 현덕 (서울, 1909~?)
- 등단 : 1938년 소설 [남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