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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의 중심 공간 -덕수궁

2010-11-16

덕수궁 대한문 앞, 궁을 순찰하던 수문군들이 교대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궁의 정문인 ‘대한문’으로 향한다.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은 궁을 지키던 수문군들의 교대절차를 보여주는 행사다. 북을 치는 역할은 관람객의 몫, 세 번의 북소리가 울리자 위엄과 절도를 갖춘 수문장을 필두로 기수, 군사, 취타대 등이 뒤를 따른다.

덕수궁

왕이 머무는 ‘궁’은 왕권의 상징이요, 조선의 위상을 나타내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던 시절에는 가장 먼저 ‘궁’을 정비했다. 서울에 있는 5대궁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경희궁, 덕수궁을 가면 시대에 따른 왕권의 변천사를 확인해볼 수 있다. 수문장 교대식이 열리는 덕수궁에서는 왕권이 추락하면서 규모가 축소된 아픔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 지하철 1호선과 2호선 시청역에 하차, 덕수궁 방면 출입구로 나오면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과 마주하게 된다. 원래는 편안할 안 (安) 자를 써서 대안문이었지만 1904년 화재가 난 이후 ‘하늘을 여는 문’ 이라는 뜻의 대한문으로 개명했다. 5대궁 가운데 규모가 가장 작은 덕수궁은 본래 정궁이 아니라 임금이 잠깐 머무는 행궁이었다.

대한제국 시대

274년 동안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덕수궁이 한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유는 1897년으로 돌아가 보면 확인할 수 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987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국호를 ‘대한’이라 정하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한다. 덕수궁은 황제국 시대를 열었던 역사현장인 것이다.

덕수궁 관람은 정문에서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중화전부터 시작한다. 덕수궁의 정전으로 고종이 황제 등극 후 신하들과 함께 회의를 하고 신하들의 하례, 외국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의식을 치른 대한제국의 심장부이다. 매주 토요일 오전 9시에서 오후 4시까지 개방한다. 고종의 집무실 역할을 했던 석조전은 왕의 근대화 의지를 보여주는 서양건축양식의 건물이다.

한국 근대사의 중심

고종황제가 마지막까지 거쳐했던 함녕전은 고종의 침소건물로 1919년 68세의 나이로 승하할 때까지 머물렀던 장소다. 함녕전 옆에는 덕홍전이 있는데, 귀빈실로 사용되기 전 이곳은 명성황후의 신위를 모셨던 경효전이라는 건물이었다. 명성황후를 옆에 두고 싶어 했던 고종의 마음이 느껴진다.

대한제국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덕수궁은 우리 역사 최초로 황제국 시대를 열었던 동시에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는 굴욕을 당했으며 일제에 의해 전각이 하나하나 헐려나가고 궁역이 잘려나가면서 허물어지는 국운과 운명을 함께 했다. 서울의 5대궁 가운데 가장 소박한 궁이어서 지나칠 수 있는 덕수궁이지만 조선을 근대국가로 키우려는 야망을 품은 공간이요, 근대사의 중심이 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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