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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인 천상병

2014-05-20

한 시대를 소풍 온 것처럼 여유로운 시각으로 풍류를 즐기며 살다간 고 천상병 시인!
올해로 추모 21주년을 맞이하지만 한국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천상병 시인의 삶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시선과 사람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 그리움이 되어 남아있다. 천상병 시인에 관한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맑은 영혼의 시인, 기인 천상병맑은 영혼을 가진 시인 문단의 마지막 대표 기인 천상병.. 가난했지만 욕심이 없는 무욕의 삶을 즐겼던 천상병 시인의 삶과 그가 남긴 시들은 갈수록 인간의 본성을 잃어가고 바쁘게만 달려가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귀천’에서 그는 세상은 아름답고 즐겁게 왔다가는 소풍과 같다고 했다.

봄 소풍 같은 묘제올해로 천상병 시인이 귀천한 지 21주년! 천상병 시인을 사랑했던 동료, 후배 시인들, 지인들은 매년 기일 때면 어김없이 천 시인의 묘소를 찾아 묘제를 지낸다.
늘 즐거운 마음으로 맑고 아름다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사랑했던 시인의 삶 처럼, 묘제를 지내는 풍경이 즐거운 소풍 같다. 우울한 분위기는 없고 시종 유쾌한 분위기가 흐른다. 하늘에 있는 시인도 더불어 소풍을 즐길 것만 같다. 시낭송도 하고, 노래도 하고 의정부 예술의 전당에서 백일장도 한다. 그야말로 세상을 소풍놀이라고 하던 천상병 시인의 삶에 걸맞는 묘제다.

대학 중퇴 후 1965 년에 등단천상병 시인은 일보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아 한국으로 왔다. 문학에 천재성을 보인 그는 국어교사였던 시인 김춘수와 유치환의 추천으로 중학교 3학년 때 ‘강물’이라는 시를 ‘문예’지에 싣기도 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상과 대학에 진학했지만 시 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대학을 중퇴하고 ‘갈매기’라는 작품을 ‘문예’지에 발표하며 정식으로 등단한다. 1967 년에는 동백림간첩사건에 연루돼 6개월 간 옥살이를 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고통 받던 중 어느 날 부터 천 시인이 보이지 않자 지인들은 죽은 것으로 알고 그의 시를 모아 유고집 ‘시’를 출간했는데 이후 천 시인이 다시 나타나 유고집이 해프닝이 된 일도 있었다.



가난했지만 행복한 삶을 살았던 시인평생 가난했지만 천상병 시인의 얼굴에는 늘 행복한 미소가 넘쳤다. 그의 글에서도 우울함을 찾기 어렵다. 늘 아름다운 시선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가슴에 품고살던 그의 삶은 그가 남긴 시들에서 느낄 수 있다. 예전에 비해 전반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고있는 현대인들에게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간 천상병 시인을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하며 자신들의 삶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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