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의 1차, 1979년의 2차 등 두 차례 국제 석유 파동을 말한다.
중동 산유국들이 생산·공급을 제한함으로써 국제 유가가 각각 3 ~ 4배씩 뛰어올라 인플레, 불황과 실업, 국제수지 악화 등 3중고를 겪었다.
제1차 오일 쇼크
1973년 10월 6일 발발한 제4차중동전쟁을 계기로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의 석유수출금지, 양적 제한과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실시한 원유가격의 대폭인상에 의해 발생했다.
1973 ~ 1974년에 걸쳐 국제유가가 약 4배 급등했다.
1차 오일쇼크는 실제 가격 폭등에 의한 충격도 컸지만, 석유가 싼값으로 필요한 양이 공급된다고 믿었던 안이한 인식을 뒤바꿔놓는 충격이 더 컸다.
제2차 오일 쇼크
제1차 오일 쇼크는 1978년에 가서야 일단 진정됐다.
그러나 1978년 말 이란의 국내 혼란과 1979년 초의 이슬람혁명을 계기로 다시 제2차 오일 쇼크가 일어난다.
세계 제2의 석유수출국 이란이 공급을 중단했고, 이에 대응해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증산을 해 석유 공급양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그러나 1979~1981년에 걸쳐 원유가격은 다시 3배 가까이 치솟아 '3중고'의 위기가 발생한 것.
오일 쇼크와 한국경제
한국경제는 1차 오일쇼크에서는, 물가가 20% 이상 뛰고, 경제성장률이 12% 대에서 7%대로 주저앉았지만, 유가가 3배나 오른데 비하면 충격이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유사한 사태에 대비해 경제 체질개선 등은 하지 않은 채 중화학공업정책을 강행하여 경제규모의 확대에만 몰두했고, 그런 상태에서 제2차 오일 쇼크를 맞게 돼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경제성장률은 1979년 6.5%로 둔화된 데 이어 1980년에는 5.2%의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했다.
경상수지 적자폭은 1979년 42억 달러, 1980년 53억 2천만 달러로 각각 불어났다.
물가 상승률은 30%에 이르렀다.
외채는 제1차 오일 쇼크 이후 100억 달러를 넘어선데 이어 제2차 오일 쇼크로 인한 국제수지 적자폭의 증대로 200억 달러를 넘어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