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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양왕 즉위 배경

2014-07-26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고려 말 권력을 잡은 이성계 세력의 개혁과 조선 건국을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이 시작된다.
가장 핵심적인 사건은 이미 폐위된 우왕 세력을 제거하고 또 당시 왕이었던 창왕까지 폐위시키면서 공양왕을 즉위시킨 것이다. 공양왕 즉위 전후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국민대 국사학과 박종기 교수와 함께 조명한다.

우왕 복위 시도 사건공양왕이 즉위한 시기는 1389년 11월이다. 이성계 개혁 세력은 위화도 회군 직후인 1388년 7월부터 공양왕 즉위를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워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김저의 옥사라고 불리는 우왕 복위 사건이 일어난다 이미 폐위된 우왕은 최영의 조카 김저를 불러 곽충보를 사주해 이성계를 살해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곽충보가 이를 사전에 이성계 세력에게 보고해 김저는 처벌되고 폐위된 우왕은 강릉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명나라의 서신 유출 사건‘예부’는 오늘날의 외교부에 해당한다. 1939년 9월 고려의 사신 권근이 당시 천자국이었던 명나라의 예부가 황제의 명을 담아 보내는 예부자문을 받아 고려로 돌아오던 중 미리 그 내용을 읽어보았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왕, 창왕이 정통 왕손이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을 이성계 세력에게 보고해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킬 명분 중 하나로 삼았다.

명, 고려왕 즉위와 폐위 사전 보고안한 것에 대해 유감현재 명나라의 역사에 남은 기록에는 고려에 보낸 예부자문에 우왕, 창왕이 정통 왕손이 아니라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예부자문과 관련한 이성계세력의 주장은 조작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명의 기록에는 단지 우왕, 창왕의 폐위, 즉위와 관련해 명에 보고하지 않은 것에 대한 유감의 뜻이 담겨있다.
우왕, 창왕의 폐위와 공양왕의 즉위까지 일련의 사건들은 고려말 개혁 추진과 함께 조선 건국을 위한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의 치밀한 계획 하에 이뤄진 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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