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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왕건과 견훤의 ‘나주 전투’

2014-09-20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일생은 ‘전투’의 연속이었다.
지난주에는 왕건이 고려 건국 이후 후백제의 견훤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팔공산’ 전투를 조명했다. 이번 시간에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전에 견훤의 군대와 대결한 ‘나주 전투’에 대한 얘기를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종기 교수와 함께 알아본다.

대외 무역, 외교의 요충지 ‘나주’나주 지역은 후백제의 배후지였다.
서해안 교역의 중심지로 당시 중국의 5대 국가가 모두 중국 남쪽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나주는 이들 국가들과 또 일본과의 교역의 중심지로 요충지였다. 외교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나주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왕건과 견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궁예 휘하에 있던 왕건, 나주 전투서 견훤 부대 격퇴고려사에 나타난 ‘나주 전투’에 대한 기록을 보면 나주 전투는 910년, 왕건이 궁예의 휘하에 있던 시기에 견훤과 벌인 전투다.
당시 수적으로 열세에 놓인 왕건의 부대는 왕건의 지략으로 500여 명의 견훤의 정예부대를 해상에서 격퇴하고 견훤은 도망을 간다. 이 전투의 승리로 궁예는 삼한 지역의 2/3를 차지하게 됐다.

나주 전투로 왕건, 제 2인자로 부상왕건을 나주 전투에서의 완승으로 궁예 부대의 제 2인자로 부상하게 된다. 8년 후 궁예를 몰아내고 제 1인자가 돼 고려를 건국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이 전투 승리의 요인은 무엇보다도 왕건의 뛰어난 지략과 전술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왕건의 집안이 대대로 해상 무역을 하며 해상 호족들과의 친분이 두터웠던 것도 승리에 도움이 됐다.

왕건, 호족 세력들과 결합 위한 정략결혼왕건의 부인은 모두 29 명이다. 대부분 토착 호족 세력들과의 결합을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첫 번째 부인은 전주 이씨 가문으로 개성의 해상 호족의 딸이었다. 또 두 번째 부인은 나주 해상 세력의 중심에 있던 고달현의 딸이다. 이런 호족 가문과의 혼인으로 호족 세력들의 도움으로 왕건은 나주 전투에서 승리하고 또 고려 건국에도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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