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점 혈육 없이 세상을 떠났지만, 많은 국악인들이 어머니처럼 생각하는 분이 바로 김월하 명인이다.
1917년 경기도 고양군 한진면에서 태어났는데, 지금의 서울 이태원 부근이다. 두 살 때 콜레라가 창궐해 가족의 대부분을 잃었고 부친이 실성하다시피해 집을 나가버리자 이모집에 얹혀 살다가 어느 집의 양녀로 들어가 자랐다고 한다. 열 여섯 살에 혼례를 올렸지만, 자상한 남편은 6·25때 실종되어 버리고, 부산에서 삯바느질로 피난살이를 하던 중에 위궤양을 앓게 되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하고, 회복차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간 길에 우연히 시조를 듣게 된 것이 김월하 명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처음에는 오며 가며 귀동냥으로만 노래를 익히다가 당시 정가의 큰 봉우리로 불려지던 두봉 이병성 명인을 만나 본격적으로 시조와 십이가사를 익혔고, 41세에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열린 명창대회에서 시조부문 1등을 수상했다. 이를 계기로 이주환 명인을 만나 가곡을 차근차근 배웠는데, 가곡은 시조나 가사와 달리 관현악 반주가 따르기 때문에 이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양금과 거문고까지 병행해 배웠고,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의 예능보유자로 지정 되었다. 맑고 고우면서도 기품있는 노래는 지금도 정가의 정석처럼 여겨지고 있다.
“가곡은 하면 할수록 어렵고 두려워요. 자신이 지닌 음성을 다 써야 하는데다가 길게 뽑으면서도 잡스러운 목소리가 들어가면 되지 않으니까 그게 좀 어려워요. 그래서 가곡을 높은 산꼭대기에서 우람한 통나무를 베어 끌어내리는 소리라고들 그러지요.”
1991년에 재단법인 월하문화재단을 설립하고, 1992년 문화훈장 보관장, 1994년 자랑스러운 서울시민상, 1995년 KBS국악대상 특별공로상을 수상했다.
근검 절약이 몸에 배어 가까운 거리는 당연히 걸어다니며, 흔한 가스렌지도 없이 오래된 석유곤로를 사용했다는 김월하 명인은 그렇게 모은 재산을 대학에서 공부하는 어려운 환경의 후학들을 위해 장학금으로 지급해 현재 중견 국악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입고 공부를 했다. 또 사후에는 전 재산 수십 억 원을 월하문화재단에 기부해, 각종 연주회 지원과 장학금 지급, 정가 보존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 등에 사용되며 국악 발전과 보급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오늘의 선곡
1. 평시조 청산리 / 노래 김월하
2. 여창가곡 계면 평롱 북두칠성 / 노래 김월하
3. 시창 관산융마 추강이 / 노래 김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