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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신라시대에도 조기 유학붐이 있었다는데, 사실인가요?

2011-06-18

신라시대에도 조기 유학붐이 있었다는데, 사실인가요?
천재는 대개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최치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또래 아이들보다 일찍 글을 깨우쳤고, 열 살이 되었을 때는 이미 유교 경전인 사서삼경을 줄줄 읽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치원의 아버지는 똑똑한 아들을 바라보면서 오히려 근심에 휩싸였습니다. 신라에서 신분은 크게 귀족인 진골과 평민인 육두품으로 나뉘었는데 그의 집안은 육두품이었습니다. 원래는 육두품 출신도 능력에 따라 높은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진골 귀족들끼리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데 골몰하던 당시에는 진골 출신이 아니면 관직에 나아갈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고민하던 최치원의 아버지는 아들을 당나라에 유학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조기유학인 셈이지요. 당나라에서는 관리를 신분으로 뽑지 않고, 과거시험에 합격한 자로 뽑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당나라에는 외국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과거시험이 따로 마련되어 관직등용문이 넓었습니다.

그리하여, 최치원은 열두 살 때 당나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가 떠날 때 아버지가 굳은 표정으로 말합니다.“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말아라. 나도 너와 같은 아들을 두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아버지의 진심은 아니었겠지요. 아들이 한 눈 팔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과연 최치원은 유학생활 6년만인 열여덟 살에 당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당나라 사람들은 외국인이 그렇게 어린 나이에 합격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깜짝 놀랄 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당시 당나라 또한 나라가 어지러워 백성들은 세금 때문에 허리가 휠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황소’라는 사람이 농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죠. 그들의 기세가 얼마나 거셌는지 도읍인 장안으로 쳐들어올 태세였습니다.

당시 관직을 맡고 있던 최치원은 황소를 꾸짖는 격문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 글이 얼마나 실감이 났는지 황소가 글을 읽다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후 황소의 난은 진정이 되고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더욱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몸은 당나라에 있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신라를 향하고 있었던 최치원. 신라가 왕실의 다툼으로 어지러운 가운데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소식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마침내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에 그는 당나라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백성들의 형편을 살피고 나라를 개혁할 방안을 연구하여 ‘시무10조’를 만들어 왕에게 올렸습니다. 하지만 최치원의 시무10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진골 귀족들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힌거죠. 이를 바라본 최치원은 관직을 버리고 산속 절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결국 그가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고, 다만 그가 남긴 절절한 시만이 사람들의 마음에 남았습니다.

“바라오니 욕심의 문을 굳게 닫아서 / 몸을 더럽히지 말지어다. / 저 진주를 탐내는 무리들 / 죽음도 무릅쓰고 바다 속에 뛰어드네. / 부귀를 탐내면 티끌에 물들기 쉽고 / 마음에 때 묻으면 허물 씻기 어려우리라. / 담박한 이 생각 누구에게 말할까? / 세상 사람들 모두 다 달콤한 술만 즐기고 있으니.”
신라 천재 최치원이 마지막으로 남긴 이 싯귀, 마치 지금 우리에게 말하는 듯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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