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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장군 이순신! 최고의 장수들을 만나다

2009-09-26

장군 이순신! 최고의 장수들을 만나다
이순신 함대의 최강 수군
제 아무리 뛰어난 장수라도 혼자 전투에 나설 수는 없는 법! 이순신 함대를 최강의 수군이라 부르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이순신 함대의 최강 수군들이 이순신 장군의 곁을 지켰기 때문이다.

녹도진 책임자 만호 정운
1592년 2월,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휘하 부대 순시에 나섰다. 당시 군사기지였던 5포의 진을 하나하나 직접 순시했던 이순신 장군은 전쟁 준비 상태가 허술한 기지의 책임 관련자를 모두 처벌할 만큼 꼼꼼하게 군기 검열을 실시했다. 특히 녹도진은 다른 진에 비해 전쟁 준비 상태가 완벽했고, 이순신 장군은 녹도진의 책임자인 만호 정운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만호 정운은 의협심 넘치는 선비이자 강개한 기개를 지닌 무장으로, 누구보다 완벽한 태세를 갖추고 왜구에 맞선 장수였다. 또한 이순신 장군과는 함께 술을 기울일 정도로 친분을 과시하고 서로의 심중을 잘 헤아려 신뢰하고 의지했던 사이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옥포해전 출전도 바로 정운의 진언에 의해 결행됐던 것이다. 하지만 정운은 1592년 9월,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했고, 이순신 장군은 직접 제문을 지어 정운을 추모하기에 이르렀다.

최고의 자문, 정걸
정운은 전사했지만 이순신 장군 곁에는 자문 역할을 하던 정걸이 있었다. 정걸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 조정으로부터 6점이나 되는 교지를 받든 인물이었다. 정걸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수사를 지낸 화려한 군 경력을 갖고 있었지만 노령으로 은퇴할 나이였다. 이순신 장군은 장수의 자문 역할을 하는 ‘조방장’으로 정걸을 강력 추천했는데, 이순신 장군이 47세의 나이로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던 당시 정걸은 31살이나 많은 78세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의 중대한 일을 맞아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행주대첩에서 활약하는 등 일선에서 수군 장수로 크게 활약했다. 또한 실전 경험과 전함, 무기 운용에 탁월한 식견으로 이순신 장군의 최고 자문 역할을 충실히 했다.

거북선 설계자, 나대용
‘거북선’하면 보통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는데 거북선을 만든 인물은 따로 있다.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던 1591년, 한 청년이 거북선 설계도를 들고 이순신 장군을 찾았다. 그는 28세에 병과에 합격해 훈련원 봉사를 지내던 나대용으로 거북선 설계도로 단번에 이순신 장군의 마음을 사로잡아 군관에 임명된 뒤, 본격적으로 거북선 제작에 나섰다. 거북선은 뚜껑을 덮어 병사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쇠못을 꽂아 적이 배 위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는 등, 조선의 주력 전함인 판옥선의 단점을 일시에 해결해,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한 송희립
전남 고흥 여산 송씨 3형제는 임진왜란 당시 모두 이순신 장군의 군관이었다. 특히 3형제 중 둘째 송희립은 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의병들을 이끌고 이순신 장군 휘하로 들어갔는데, 임진왜란 초기에 전사한 ‘정운’의 자리를 대신해 전란 내내 이순신 장군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 당시, 대장선 갑판에서 최후를 맞는 순간에도 송희립은 이순신 장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쓰러지자 송희립은 그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 이순신 장군의 갑옷과 투구를 입고 대신 독전고를 울렸다.

이순신 장군은 물론 정운, 정걸, 나대용, 송희립까지 최강 수군 이순신 함대를 만든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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