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용차는 연달아 자동문 밖에 와서 멎고,
아버지와는 너무도 딴판인,
억수같이 퍼붓는 소나기 속을 물 한 방울 안 맞고 십리도 가게 생긴
새앙쥐 같은 사내들이 그 속에서 내렸고,
그 때마다 아버지는 경의를 과장한 ‘경롓’을 올려붙였다.
아버지의 당당한 거구와 비상식적인 화려한 옷은
넥타이 맨 새앙쥐들의 우월감을 충족시키기 위한 어릿광대의 의상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아버지의 방 유리창에 ‘수위실’이라고 써 있는 걸 읽을 수가 있었다.
- 방송 내용 중 일부
그는 <청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의 서두에서
그의 생애를 지배해 온 세 가지의 정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동경과 지식의 탐구,
고통받고 박해받는 약하고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참을 수 없을 연민이라는 거였다.
그 대목은 늘 내 정결한 피를 끓게 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죽는 날까지 정열을 바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신성한 공부방에 저따위 사진을 붙여놓고 공부가 될 성 싶으냐?”
“아버지, 이 분은 딴따라가 아녜요. 이 분은...”
“그 작자 전구라 아니냐?
한땐 그 작자가 아버지 발밑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싹싹 빈 적이 있었지”
“그, 그럴 리가요, 아버진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인석아, 서둘지 말고 남의 말 좀 들어봐.”
# 인터뷰. 방민호 문학평론가
이 소년이 세계에 눈뜨면서 전구라가 쓴 많은 책들을 보면서 이 사람 굉장한 사람이구나. 그 언어를 통해서 표현되는 고귀한 정신을 본받아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데 실체로서의 전구라는 어떤 사람이냐? 아무렇게나 새치기하고, 사회의 부조리한 계층구조 계급구조를 이용해서 가난한 사람 힘 약한 사람을 골탕 먹이고 사법처리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들었을 때 이 소년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그것이야말로 이제 진정한 삶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진정한 늠름함 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것을 향해서 이제 첫발을 뛰게 되는 거대한 충격의 순간인 것이죠.
아버지가 나를 풀 속으로 팽개쳤을 때
허우적대다 땅바닥을 딛기까지는 순식간이었고,
아버지가 자신의 우상을 스스로 깨뜨리고 나를 자동문 밖으로 팽개쳤을 때
허우적대다가 설 자리를 찾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 허우적거림에서 설자리를 찾고
바로 서기까지는 좀 더 오랜 시일이 걸릴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외부에서 찾던 진정한 늠름함, 진정한 남아다움을
앞으론 내 내부에서 키우지 않는 한
그건 영원히 불가능한 채, 다만 허우적거림만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홀로 늠름해지기란, 아, 그건 얼마나 고되고도 고독한 작업이 될 것인가.
나는 고독했다.
아버지의 낄낄낄이 내 고독을 더욱 모질게 채찍질했다.
작가 박완서 (경기도, 1931.10.20.~2011.01.22)
- 등단 : 1970년 장편소설 [나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