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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악보 넘기는 남자 - 이청해

2022-10-25

ⓒ Getty Images Bank

아저씨는 아까처럼 악보를 정리해 피아노 끝에 놓고,

동그란 조명 밖 어둠으로 비켜났다.

그리고 투명인간처럼 서 있다.


죄송한 듯, 죄지은 듯, 고개를 약간 숙이고.

주의를 끌어서는 안 되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완전한 투명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내 눈에는 그의 모양새가 여실히 보인다.


검은 양복에 흰 와이셔츠, 회색넥타이, 검은 뿔테 안경...

아저씨의 존재는 존재 자체로 이 순간 거북살스럽다.

악보를 넘길 때 빼고는 이 무대에서 필요 없는 존재인 것이다.

완벽한 조역.

끝내 한 번도 전면으로 부상하지 않는 배역.


- 방송 내용 중 일부 



아저씨의 솜씨는 멀리에서 보기에도 일류 급이었다.

순간의 포착과 페이지를 넘기는 기술, 재빠름, 조용함, 

팔 동작이 유려함이 수준을 넘어 있었다.

바바라 보니와 헬무트 도이치는 서로 호흡을 맞춰 가며 물이 흘러가듯 선율을 타고 있었다.

청중들도 그들이 인도하는 대로 감미로운 감상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유독 아저씨 한 사람만이 이 홀 안에서

바짝 긴장하여 악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중요한 순간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반드시 해야 하기 때문에,

의자 끝에 걸터앉아 필사적으로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피아니스트였을까, 아니면 그것을 꿈꾸었던가.

그러다가 악보 넘기는 사람이 되었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저렇게 내려앉는 것일까.  



# 인터뷰. 전소영 문학평론가

이 작품은 예술에 관한 소재를 담고 있지만 좀 넓혀서 인간의 보편적인 삶에 관한 이야기로 읽어도 되겠죠. 지나치게 물질적인 풍요만이 중시되는 사회 안에서 인간은 이상이나 가치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나 인간의 삶을 정말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것은 사실 물질이 아니라 그 외에 가치들이 아닐까, 그것들을 우리가 좀 더 돌아보고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작품이 바로 이 악보 넘기는 남자입니다.



아저씨가 무르춤히 나를 건너다보았다.

눈동자가 맑았다.

그 천진한 눈이 가슴으로 쑥 들어왔다.

욕심이라곤 없는, 바보 같은 순수함이.

가슴 근처가 저릿했다.


“나가자.  우리 공원에 가서 비둘기 보자” 


나는 분잡스럽게 너스레를 떨며 일어났다.

아저씨도 덩달아 우왕좌왕하더니 나를 따라 나왔다.




작가 이청해 (광주광역시, 1948.06.30~)

    - 등단 : 1991년 단편소설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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