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Go Top

문화

처염 - 임노월

2023-06-20

ⓒ Getty Images Bank

세상이 다 알다시피 나는 수완과 기지를 풍부히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나의 이 모든 재능과 활발한 성품이

일개 여성의 꼬임 때문에,

무능해지고 나약해졌다고 할 것 같으면

제군은 그런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웃음에 부치겠지만,

사실 나는 A라고 하는 계집 때문에 아주 못난이가 된 줄 믿어라.  


- 방송 내용 중 일부 



‘A는 어찌하여 내 맘을 이렇게까지 호리는가? 그를 생각할 때 나는 애만 써진다.

그의 곁에 있으면 어떤 이상한 마력이 있어가지고 나를 움죽 못하게 하는 것 같다.’ 


또 어떤 페이지에는 이러한 글귀도 씌어있다.


‘A한테는 알딸딸한 매운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 냄새가 이상하게도 졸음을 재촉하는 수마와 같이 내 호흡에 들어올 때는 아득해진다.

그리고 새카만 눈과 도라지꽃같이 파란 입술을 들여다 볼 때는

왜 그런지 소름이 끼친다.

그 입에다가 키스를 하게 될 것 같으면 매운 독이 묻을 것 같다.

아, 이상도 한 여자다. 나는 언제든지 그 여자한테 죽을 것 같다’ 


그 다음 페이지에는 또 이런 글귀가 있다.


‘나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여자다.

속 시원히 그 여자의 정체를 알려면 A의 속 몸을 맘대로 안아보았으면 모든 일이 알아질 것 같다.’ 



# 인터뷰. 전소영

처염하다라는 말은 ‘처절하게 아름답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임노월이 <처염>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도 사회를 위한 이념이라든지 교훈이 결코 아닙니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처절할 정도로 아름다운 것 즉 ‘처염’, 그 자체를 그려내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할 수 있죠. 

3.1운동 이후인 1920대 조선의 문단에서는 사회와 이념을 중시하는 문학인들이 득세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분위기 안에서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고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했던 임노월은 소외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어요. 결국 임노월은 1920년대 중반에 갑자기 절필 선언을 하고 문단에서 종적을 감춰버렸습니다



A한테는 사내의 정열을 해롭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 힘이 독한 버섯과 같이 사내의 정열을 한량없이 매혹하면서도 해를 끼친다.


이렇게 생각할 때 나는 무서운 생각이 났다.

이러한 미신적인 일이 과연 실지로 있을까?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모두 다 나의 망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꿈을 꾸고 난 그 이튿날에는 반드시 병세가 중해지는 일을 무엇으로 설명할꼬?


나는 병석에 누워서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오, 오, 알아낼 수 없는 A여!


그대는 왜 꿈 가운데서만 나를 찾는가?

괴로움 가운데서 헤매며 그대를 찾는 줄 모르는가?


‘여자는 사내에게 대해서 꿈이요 또한 그림자다’라고 한 타고르의 시구가 생각된다.

나는 그 때 영구히 위로받지 못할 한숨을 쉬며 혼자 잠이 들었었다.




작가 임노월 (본명 임장화, 출생·사망 연도 미상)

    - 등단 : 1920년 단편 [춘희]  

Close

우리 사이트는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키와 다른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계속 이용함으로써 당신은 이 기술들의 사용과 우리의 정책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