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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유리주의 - 이은선

2023-07-04

ⓒ Getty Images Bank
버스가 올라왔다. 
턱시도를 차려입은 도어맨이 허리를 굽혀 손님들을 맞아주었다.

건물 고층에 매달려 유리를 닦던 사람들이 도르래 줄에 달달 끌려 올라갔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새들을 미처 치우지도 못한 상태였다.
사람들이 차에서 내리기 직전에 청소부와 도어맨이 
대가리가 터지고 몸통이 부서진 새들을 맨손으로 집어 올렸다.

호수의 수면 아래에서 무엇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살이 잘박잘박 흩어지며 햇빛을 튕겼다.

- 방송 내용 중 일부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깊은 밤마다 온몸이 물에 젖은 괴물이
호수를 이탈하여 산 곳곳을 드나든다는 말도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슬쩍슬쩍 물 바깥으로 나가보았다.
그 역시도 오래지 않아 흥미를 잃었다.
그렇다고 해서 호수의 생활이 모두 심드렁한 것만은 아니었다.
청소부들이 시시때때로 도르래를 타고 오르내리며 괴물에게 안부를 물어왔기 때문이었다.

청소부들은 유리창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유리 안쪽의 일에 눈을 감고, 
바깥쪽의 얼룩을 지우는 일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다.
간혹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다가 투숙객의 항의를 받기도 했지만
도르래 줄을 타고 올라가버리면 그만이었다.


# 인터뷰. 전소영
호텔에 방문한 사람들은 철저히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고, 자기 욕망을 채우는 일에만 몰두해 있어요. 그렇게 자기 삶을 즐기는 와중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들은 유리에 부딪혀 죽고, 유리벽을 청소하는 분들의 노동은 소외되고, 괴물은 존재가 지워집니다. 
인간이 타인과 세계에 관심을 갖지 않고 이기적으로 살아간다면 그 순간에는 안락하고 편안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내가 타인에게 무관심해질 수 있다는 것은 반대로 타인 역시 나에게 무관심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도 언제든지 이 사회 안에서 존재감이 지워질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삶이 과연 안전하고 평화롭기만 할까 나부터 소외된 타인을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작품은 이런 질문을 유쾌하면서도 섬뜩한 풍경을 통해 우리에게 건네고 있는 것입니다.


버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후진으로 올라오다 호텔 현관문을 꽝 박았다.
문 위에 매달린 호텔의 현판이 툭 떨어졌다.
도어맨과 가이드가 입을 딱 벌리고 버스와 현판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관광객들이 떠나자 다시 도르래를 탄 사람들이 허공에 떴다.
호수 안으로 들어가 있던 괴물이 기지개를 켰다.
새떼가 날아와 유리창에 부딪혔다.
호텔의 현관에 뒤늦게 실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용히 문을 가른 금이 ‘유리주의’라고 쓰인 여러 나라의 말들을 뒤덮었다.
금은 호텔 현판이 있던 쪽으로도 다가갔다.
새를 줍던 청소부와 도어맨이 뒤늦게 문을 붙들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새로운 투숙객들을 실은 버스가 올라왔다.
유리에 금이 가는 것보다 버스가 호텔로 올라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허공의 청소부들이 건물 위로 솟구쳤다.
호수를 유영하던 괴물이 긴 숨을 내뿜었다.
금이 유리 호수 쪽으로 맹렬하게 번져갔다.



작가 이은선 (충남 보령, 1983~ )
    - 등단 : 2010년 단편 [붉은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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