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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미조의 시대 - 이서수

2023-10-10

ⓒ Getty Images Bank
두 번째 집은 오늘 볼 집 중 에서 가장 비싼 집인데,
볕이 드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앞쪽에선 1층으로 보이지만
뒤쪽은 반 지층으로 늘 불을 켜 놓아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5천만원은 아버지가 평생 모은 재산이었지만,
서울의 집값은 아버지 유산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고,
아버지는 6평 남짓한 반지하방 전세금만 남겨준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 미조는 서글펐습니다.   

- 방송 내용 중 일부 


오늘도 성인 웹툰을 그리다가 온 언니는
지난 번 보았을 때보다 낯빛이 더욱 어두웠다.
새로 시작한 작업이 이전에 맡았던 것보다 더 심각한 내용이라고 했다.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성행위를 즐기는 남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웹툰이었고,
그걸 그리는 언니는 매일 힘들어했다.

사장은 대박이 확실한 작품이라고 어시들을 독려했지만
거의 모든 어시가 여성이었기에 분위기는 언제나 좋지 않았다.
작업을 하다가 엎드려 우는 동료도 있었고,
우울증 약을 먹는 동료도 있었다.  


# 인터뷰. 전소영
이 작품은 어둡고 암울한 시대의 풍경을 미조와 미조의 어머니, 수영 같은 가장 평범한 존재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전망이 부재하는 현재와 미래에 절망하고 상처도 받죠. 그럼에도 삶을 포기하지는 않아요.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마치 여린 풀이 바람에 막 휘청이면서도 꺾이지 않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데요. 그런 힘, 연약하지만 부러지지 않는 그 힘을 상징하는 것이 작중에 등장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조야, 내가 가발 공장을 다녔더라면 내 정수리가 이러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정수리가 이랬어도 가발을 직원 할인가에 살 수 있었겠지.
그런데 미조야, 내가 지금 레종이랑 도림천에 버려져 있는데
여기 온통 중국말만 들린다.
미조야, 나는 내가 예쁘지 않고 날씬하지도 않은 건
한 번도 걱정 한 적이 없는데 그림을 잘 그리는 게 너무 걱정이다.
아직도 나는 너무 잘 그리거든.
네가 이 얘기 싫어하는 거 알지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할게.
내가 그린 웹툰, 진짜 잘 팔려.
오늘은 팀장한테 불려가서 칭찬도 들었다.
잘 자라, 이게 돛대다. 

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일기장을 펴 들었다.
벽 너머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동시에 문장을 쓰고, 언니는 아마도 걷고 있을 것이다.
내일은 멀고, 우리의 집은 더 멀고,
민들레 꽃씨가 날아와 우리 머리 위에 내려앉는 꿈은 가까운 그런 밤이었다.



작가 이서수 (서울, 1983년~)
    - 등단 : 2014년 단편소설 [구제, 빈티지 혹은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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