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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만화경 - 안윤

2023-10-24

ⓒ Getty Images Bank
나경은 베란다로 나갔다.
속이 답답할 때면 가끔씩 베란다에서 환풍기를 켜고 담배를 태웠다.
이혼 전에는 입에도 대지 않던 담배를 물고 있으면, 
학창 시절에도 해본 적 없는 일탈을 뒤늦게 저지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사 오기 전부터 설치되어 있는 구형 환풍기에는 
가장자리를 둘러 빼곡하게 야광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누가 붙였을까?  왜 방 천장이나 창문이 아니라 베란다에,
 그것도 누렇게 변색된 환풍기에 야광별 스티커 같은 걸 붙여 놓았을까’ 

- 방송 내용 중 일부 


101호에 단심이 이사 온 뒤로 건물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다.

언젠가부터 건물 앞 골목은 깨끗하게 비질이 되어 있고,
빌라 입구에 칠이 벗겨진 우편함도 선홍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맞은 편 건물 모퉁이에 있는 감나무 밑도 소란스러워졌다.
낡은 의자 몇 개가 쓸쓸하게 놓여있던 그 곳에서
단심과 숙분, 근처 어르신들이 모여 수시로 수다를 떨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단심은 이따금 전을 부쳐 주변에 돌리기도 했다.
납작납작하게 썬 고구마를 깻잎에 감싼 전,
팽이버섯을 동그렇게 펼치고 그 위에 달걀을 풀어 구운 전,
꼬들꼬들한 현미밥에 
청양고추를 총총 썰어 넣은 막장을 비벼 누룽지처럼 바삭하게 부친 전.
나경은 여름 동안 듣도 보도 못했던 전들을 맛보았다.

나경은 단심의 집에 잠시 머무는 동안 
202호 미래 씨가 직접 뜬 도일리 코스터를 사용하고,
201호 현정 씨가 가져다 준 세작 녹차를 마시거나
301호 기연 씨가 출장 다녀오는 길에 사왔다는 망개떡을 먹었다.


# 인터뷰. 전소영
만화경이라는 제목에 작품의 의미가 압축되어 있는데요.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독거인 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인공 나경도 이혼 후에 홀로서기를 하는 중이고, 숙분이나 단심 할머니도 독거노인이고, 다른 여성 세입자들도 1인 가구에 해당하는 인물들이에요. 그런데 이들은 고립된 삶 대신 더불어 사는 길을 택하면서 다정하고 훈훈한 유대 풍경을 만들어 냅니다. 이 작품은 그런 차원에서 이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만화경 속 세상에 비유 될 수 있겠죠.
이 작품은 고독사의 문제를 소재 삼아서 현대 사회 안에서 헐거워진 관계의 모습을 좀 생각해 보기도 하고 또 그것을 넘어서는 따뜻한 이웃의 유대와 타인에 대한 애도의 풍경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환풍기 날개가 빠르게 제 자리를 맴돈다.
회전하는 날개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담배 연기를 올려다보면서
나경은 미리내, 하고 말해본다.

누렇게 변색된 플라스틱 환풍기 가장자리에 빼곡하게 붙어 있는
야광별 스티커를 세어본다.
서른 다섯 개, 미리내의 나이보다 두 개 많고, 나경의 나이보다 하나가 적었다.

왜 하필 여기에 붙였을까,
그 궁금증은 끝끝내 물음표로 남았다. 



작가 안윤 (부산, 1982년~)
    - 등단 : 2021년 장편소설 [나지라, 쿠르만, 이카티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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