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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 - 이세형

2023-11-14

ⓒ Getty Images Bank
한때 예술가들은 AI가 예술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AI는 알고리즘이고, 알고리즘은 창의성을 가질 수 없으며,
따라서 창의성이 요구되는 예술 분야는 넘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창의성이 없는 작품이어도 사람들에게 정서적인 만족감을 선사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모든 예술분야를 AI가 장악한 시대였고, 
인간 예술가가 벌던 돈을 AI 회사가 벌어들이는 시대였다.
여자와 남자가 한때 예술가를 꿈꾸었다는 게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두 사람이야말로 AI예술 시대의 문을 연 선구자였다.   

- 방송 내용 중 일부 


어느 날, 여자가 현관문을 열자 색소폰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듣는 그의 연주에 여자는 마음 한 곳이 따스하게 녹아내렸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남자는 색소폰을 부는 시늉만 하고 있었고,
연주 소리는 AI가 만든 것이었다.
원래 남자는 적당한 타이밍에 진실을 밝혀 웃긴 모습을 연출하려 했다.

“그만해!” 

잠시 후, 여자는 남자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과란 감정적인 힘이 많이 소모되는 행동이었고,
여자는 사과를 하기에는 감정적으로 지쳐 있었다.
망설인 끝에 남자에게 문자메시지를 전송했다.
여자의 심리상태를 분석한 AI가 자동으로 생성한 문자메시지를.


# 인터뷰. 전소영
이 작품은 AI가 일상화된 가상의 미래의 모습을 통해서, 실용성과 효율성이 가장 중시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인간의 관계라든가 감정의 문제까지도 완전히 장악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중 세계에서 처음에는 인간이 타인의 감정전달을 대행하다가 나중에는 AI가 도맡게 됩니다. AI를 통해 만든 관계가 진정한 관계일 리는 없겠죠. 그래서 남자와 여자도 결국 결혼생활에서 파국을 맞게 되었고요. 그런데 사실 현실세계에도 이 감정대행업이 존재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별대행서비스, 부모대행서비스 이런 것들이 생겨났는데 먹고 살기도 바쁜 와중에 감정까지 소모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만연해지고 또 상대적으로 감정소모가 덜한 온라인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대리자에게 맡겨 버리는 풍토가 생겨난 것이죠. 이 작품은 그런 측면에서 현대인의 어두운 근 미래를 보여주는 것도 같습니다.


나는 조만간 ‘누군가와 사랑하는 관계로 맺어질 경험’을 판매할 계획이다.
사랑에 관한 감정 경험이 없더라도 생존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게다가 누군가와 사랑을 맺는다고 해봤자
그 사람과 내가 함께 할 수 있는 게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감정 경험을 대부분 팔아치운 상태다.
그러니 조금의 돈이라도 벌기 위해 팔아버리는 게 차라리 나은 것, 그것이 사랑이다.

나는 내가 겪을 미래의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작가 이세형 /장르문학 플랫폼 ‘브릿G'에서 활동하며 여러 분야의 소설을 연구하고 시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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