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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요카타 - 정선임

2023-12-26

ⓒ Getty Images Bank
지난 주 목요일, 진에게 한글을 배우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서연화 할머니, 맞으세요?  할머니, 올해 백 살 되신 거 맞죠?”

익숙한 라디오 프로그램명을 말하며
자신을 담당 작가라고 소개한 목소리는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할머니 성함이 너무 예쁘세요.” 

백 살 할머니치고 이름이 세련됐다는 뜻이겠지.
이름이 말순이든 연화든 할머니였다.
시장에서 말순은 목포 할머니, 난 요카타 할머니로 불렸다.
내가 입버릇처럼 말끝마다 ‘요카타’ 라는 말을 덧붙이기 때문이다.

- 방송 내용 중 일부 


서연화, 그러니까 백 살치고 세련된 내 이름은 본래 언니 것이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몇 달 뒤 죽었다는 언니, 서연화.
그 사실을 알게 된 뒤로 몇 년간은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를 때면 
본 적도 없는 언니를 떠올리곤 했다.
한동안 네, 라고 대답하면 누군가가 같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살다보니 언니의 나이에도 이름에도 익숙해졌다.

언니의 사망신고도, 내 출생 신고도 하지 않은 이유를 
그저 아버지가 언니를 그리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점심 도시락을 싸서 염전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찾아갔었다.
아버지는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귀찮아서 그랬지. 사는 게 바빠서.” 

아버지에게 어떻게 도시락을 건네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발갛게 달아올라 있던 봄의 열기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낮이었고 주위가 너무 환해 빨리 땅거미나 져 어두워졌으면 하던 마음도.  


# 인터뷰. 전소영
할머니는 언니의 이름을 받고 대신 그 삶을 살게 되면서 세상에 없는 사람, 즉 죽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늘 주문처럼 “다행이다.” 하는 말을 했는데 사실은 진짜 다행이어서가 아니라 어쨌든 살아가야하니까 “다행이다.” 라는 말 뒤에 자신의 불행을 숨겨왔던 것입니다. 이 작품은 혼란스러웠던 한국의 근현대사 안에서 비극적인 사건을 겪으면서 이름조차 잃어버렸던 한 사람이 긴 세월 끝에 비로소 자신의 진짜 삶과 마주하는 이야기입니다. 


서재에 있던 책들은 남김없이 내다 팔았고,
그 후로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살았다.
바다가 데려간 것은 잊었고 다시 내어준 것을 팔아서 살았다.
가끔 이름이 불릴 때마다 구멍에 숨어 있다 잡혀 나온 게들처럼 당황했다.
하지만 또 다시 구멍 속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
다행이었지.  요카타, 요카타.

만조다.  물이 들어오고 있다.
얇은 습자지 한 장 같은 오늘을 서둘러 뜯어내고 아침을 기다리고 싶다.
해가 지기 전에, 푸르스름한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다시 눈을 감고 그림자를 쫓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나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다.



작가 정선임 (인천, 1978. ~ )
    - 등단 : 2018년 단편소설 [귓속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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