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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언니 1 - 심아진

2024-01-02

ⓒ Getty Images Bank
정무운을 처음 본 날, 
언니는 얼굴 있을 자리에 발이 붙은 남자라도 본 것처럼 놀랐다.
정작 정무운은 언니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언니의 호기심을 더 자극했다.
언니는 도대체 어떤 인간이 자신에게
길에서 나눠주는 티슈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지가 궁금했다. 

- 방송 내용 중 일부 


나는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머리를 굴리고 돈을 쓰고 미모를 이용한다.
그가 앉을 마을버스 좌석에 지난주 당첨 복권을 두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종이를 그대로 좌석 아래로 떨어뜨리고 만다.
그는 심지어 어떤 노인이 벤치에 놓고 간 가방을 보고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가방의 지퍼 틈으로 돈뭉치가 삐죽 올라와 있기까지 한데도 말이다.
델포이의 사장이 느닷없이 인센티브를 챙겨주는데도 덤덤하다.     

나는 필사적이다.        
하지만 정무운은 여전히 나에 대해서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나 해야 할 일,
할 수 없는 일이나 할 수 있는 일 모두에 공평하게 무관심하다.


# 인터뷰. 방민호
언니는 이 남자에게 불행을 줘요. 쌍둥이 여동생은 행운을 갖다줘요. 그러니까 사람 아닌 존재를 인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상당히 특이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정무운은 행운에도 불행에도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감정이 메말라 주변의 일들에 무관심 하고,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 조차도 무관심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거죠. 매일 같이 뭔가 포장하고 싸는 단순 작업에 종사하고, 그의 어머니는 치매에 결려 있습니다. 여자 친구도 없고 어떤 미래에 대한 설계도 할 수 없는 상황이죠.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이 지금 한국 사회의 젊은이들이 처한 상황이라고 하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무언가가 시야를 가린다.  
매화도 아니고 진달래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꽃이라고밖에 여길 수 없는 분홍덩어리다.
물론 우리는 곧바로 그게 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막내다.
분홍 리본, 분홍 귀고리, 분홍 후드티에 분홍 스커트, 분홍 신발,
분홍 일색, 아니 분홍 자체라 해야 할 그것이 
우리에게 씩 웃어 보이나 싶더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며 넘어진다.   

“저기요. 좀 도와주시겠어요?”

평범한 남자라면 달려와 다친 데를 살피고 부축해 일으키면서
본의 아니게 신체 여러 부위를 만질테지만,
우리의 정무운은 역시 다르다.
걷는 속도를 바꾸지 않고 느긋하게 다가오더니 막내 옆에 잠시 멈췄을 뿐이다.

“어머, 무운씨! 저 좀 도와주세요.” 

언니와 나는 적잖이 놀란다.
막내가 정무운과 아는 사이인가?


 
작가 심아진 (경남 마산, 1972. ~ )
    - 등단 : 1999년 중편소설 [차 마시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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