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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제 6부-교육으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다

2015-02-10

제 6부-교육으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다
전후 폐허가 된 한국을 다시 세우려는 전국민적인 노력이 1950년 대 중반부터 확산되고 있었다.
산업 철도, 주요 산업시설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자원이 없는 우리 한국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재 육성을 위한 교육’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전쟁 중에도 교육은 계속됐고 전후 교육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활발히 이뤄졌다. 발전의 기틀이 된 광복 직후, 그리고 전쟁 후 교육에 관한 이모저모를 조명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교육 혁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에서는 교육 혁명이 일어난다.
교육만이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전 사회적으로 확산된 가운데 1949년 12월 31일 교육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교육법’이 제정된다. 1945년 광복 당시 12세 이상의 문맹률이 77.8%였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말과 우리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교육법에서 가장 주목받은 항목은 ‘ 초등학교 의무교육’이었다.
그러나 교육법이 자리도 잡기 전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전쟁 중 ‘피난 학교’에서 수업 계속
전쟁 중 피난 중에도 곳곳에 임시학교를 열어 피난학교에서 수업이 계속됐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부모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이 어떤 어려움 속에도 자녀들의 교육을 지속하도록 하는 힘이 됐다.

전쟁 후 비약적으로 성장한 교육
어려움 속에서도 교육의 끈을 놓지 않았던 한국민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전쟁이 끝난 후에 더욱 커져 교육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1960년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초등, 중고등, 대학생 수가 1950년과 비교해 두 배가 됐고 1948년에 42 개였던 대학교의 수는 78개로 늘어났다.
문맹 퇴치 사업은 1960년대에도 계속돼 큰 효과를 거뒀다. 1960년에는 문맹률이 28%까지 낮아졌다.

한강의 기적, 원동력은 ‘교육’
전쟁 후 폐허 속에서도 한국민들은 교육의 끈을 놓지 않았고 교육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는 마음으로 교육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계속했다.
전쟁을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 수 있지만 한번 습득된 지식은 없어지지 않고 모든 발전의 초석이 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교육에 대한 열정이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한국 경제 발전을 이룬 원동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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