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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제 11부-독일로 간 한국의 청춘들

2015-03-17

제 11부-독일로 간 한국의 청춘들
1960년 대, 한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정부와 국민들이 한 마음으로 경제 재건에 힘쓴다. 그러나 자원이 없고 자본이 없어 가난을 벗어나기가 여전히 어려웠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도 세계 최 하위권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하루 세끼 밥만 먹을 수 있어도 부자 소리를 들었던 시절, 한국 정부는 세계은행에서 차관을 얻어 경제 재건을 위해 쓰려 해도 신용이 없는 나라로서는 차관을 얻는 것도 어려웠다. 그 때 하나의 돌파구가 된 것이 독일로 한국인 광부, 간호사 파견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조명한다.

1963년 독일 파견 광부 5천 명 모집
1963년 여름 정부는 독일에 파견 근로할 광부 5천 명과 간호사 3천 명 모집 광고를 낸다.
이 광고를 보고 지원한 사람 수는 광부 모집에 4만7천 명, 1963년의 한국 실업률은 8.1%, 일자리 구하기 힘든 젊은이들이 선진국에 가서 일하고 돈을 벌어 가난을 면하려는 희망으로 대거 지원했다.

1963년 12월 21일, 1차 파견 광부 서독으로
1963년 12월 21일, 1차 파견으로 선발된 250명의 한국의 젊은이들이 낯선 땅 독일로 떠난다. 이국에서 광부로 일하며 새로운 꿈을 향해 도전한 것이다.
당시 서독은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각 분야에 노동력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있었다. 특히 탄광 같은 기피 분야에는 서독 현지 근로자들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 서독의 필요, 그리고 한국의 외화 획득의 필요성, 일자리 부족 등 상황이 서로 맞아 서독 탄광으로 한국의 젊은이들을 파견하게 된 것이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서독에 파견된 한국인 광부는 모두 7936 명이다.

간호사 파견도 활발
한국인 광부의 서독 파견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당시 한국인 간호사의 서독 진출도 더욱 활발해졌다. 정부 주도로 서독에 파견된 한국인 간호사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만 2천 명이 넘는다. 한국인 간호사들은 서독의 병원에서 일하며 특유의 근면성과 섬세함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며 한국인들의 자부심을 높였다. 광부로 파견된 한국인들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조국과 가족들의 가난을 벗어나려는 집념과 희망을 가지고 인고의 세월을 잘 견뎌내며 한국인들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는데 기여했다.
젊은 나이에 이국에서 외로움과 싸우고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며 한국인의 자부심을 널리 알렸던 파독 광부, 간호사들이 1960년 대 한국 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은 모두가 기억해야 할
자랑스런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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