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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제 23화-‘5.18 민주화 운동’

2015-06-09

제 23화-‘5.18 민주화 운동’
5월 18일 오전 10시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는 민주화를 위해 항거하다 숨진 숭고한 넋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에 항거하며 이 땅의 민주화를 외치다 숨진 ‘5.18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출발점이자 아직도 아물지 않은 역사적 상처로 남‘아 있다. ’5.18 민주화 운동‘을 재조명한다.

유신시대 종식과 함께 민주주의 열망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에 의해 궁정동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다. 충격적인 사건과 함께 유신시대가 종식되고 온 국민들은 독재 청산과 함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된다.
그러나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태를 수사하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12월 12일 군사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신군부의 정치 개입에 대해 국민들은 민주주의의 퇴보이자 새로운 독재 정권의 탄생을 우려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인다. 광주 지역에서도 신군부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는 시위가 격렬했다.

5월 17일 계엄 선포와 함께 신군부의 무자비한 진압
전국적으로 시위가 격렬해지자 신군부는 5월 17일 자정,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확대 선포한다. 포고령 10호를 통해 정치 활동 금지령, 대학 휴교령, 집회 금지와 언론보도 검열 강화를 단행한다. 그리고 신군부에 반대하는 일체의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한다.

무자비한 군인들의 진압에 광주 시민들 저항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계속하던 광주 지역에 공수부대 요원들이 집중 투입됐다.
전남대학교 앞에서 학생들을 무차별로 폭행하고 시위에 참여하지 않던 시민들에게도 폭행을 자행한다. 이 광경을 지켜본 많은 광주 시민들이 광주 금남로에 집결해 계엄군에 저항하면서 5.18 민주화 운동에 불이 붙는다.
다음날인 19일 새벽 3시 경 광주에 11공수여단이 추가 배치되면서 계엄군의 진압은 더욱 가혹해진다.

5월 20일 첫 사망자 발생, 목숨 건 광주 시민들의 항쟁
시위 군중은 더욱 불어나 20일 오후엔 금남로에 3000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또 그날 오후엔 계엄군에게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가 사망해 첫 희생자가 발생했다.
또 20일 밤에는 계엄군의 발포로 시위대 2명이 사망한다.
21일에는 2만 명의 시위대를 향해 계엄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비극적인 일이 발생한다 .시위대의 시위는 더욱 격렬해지고 무기를 탈취해 계엄군에 맞선다.
잠시 소강상태가 계속되고 시민군과 계엄군간의 협상도 시작될 무렵, 27일 새벽 2만 5천 명의 계엄군은 1만 여발의 총을 시민군을 향해 쏘며 전남 도청을 기습해 4시간 만에 광주 전역을 점령했다.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비극적인 사건
정부의 계엄군이 총으로 시민들을 사살하며 무자비하게 짓밟은 비극적인 광주 민주화 운동은 그렇게 10일간의 투쟁이 막을 내렸다.
광주광역시가 집계한 5.18 민주화 운동 희생자는 사망 155 명, 행방불명자 81 명, 부상 후 사망자 110 명, 부상자 3천 3백 28 명이다 전쟁이 아닌 평상시에 무고한 시민들이 정부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례는 현대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민족적 비극이다. 아직도 많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 피해자 가족들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 지 수 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법의 심판도 이뤄지기 시작한 5.18 민주화 운동! 상처 치유 노력과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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