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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제 39부-남북 정상, 화해와 협력의 물꼬를 트다

2015-10-06

제 39부-남북 정상, 화해와 협력의 물꼬를 트다
2000년 6월 13일, 한반도에 새로운 역 사가 시작된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의 지도자가 평양에서 만난 것이다. 양측의 정상이 만나서 정상회담을 한 것은 1945년 한반도가 분단된 후 55년 만의 일이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의 만남, 그 배경과 의미를 조명한다.




남북 정상 ‘615 남북 공동 선언문’ 서명
2박 3일 동안 열린 남북한 정상 간의 첫 만남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615 남북 공동 선언문’에 서명하면서 남북 관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1972년의 ‘7.4 공동성명’이 있었지만 그것은 국가최고통치자의 위임을 받은 사람이 대신 서명한 것이었고 ‘6.15 남북 공동 선언문’은 남북의 최고통치자들이 직접 만나 협의하고 합의한 내용에 직접 서명한 것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볼 수 있다.

세계 각국들도 지지와 환영
세계 유일의 분단 지역인 한반도에서 남북한 정상들의 만남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세계 각국은 ‘6.15 남북 공동 선언문’ 채택에 적극적인 지지와 환영의 뜻을 보냈다.
미국과 중국은 즉각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이 밖에 일본과 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국가 정상 등 세계 각국 정상들의 축하 메시지가 전해졌다. 남북정상회담은 2000년 세계 10대 뉴스 중 5위를 차지할 정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다.

오랫동안 추진해 온 ‘화해와 협력’정책의 결실
2000년 6월에 이뤄진 남북 간 최초의 정상회담은 남한 정부가 오랫동안 추진해 온 ‘화해와 협력’ 정책의 결실이다.
한국 전쟁 이후 적대적인 관계가 지속돼 온 남북 관계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74년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이다. 1974년 시작된 남북 화해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또 다시 남북간 긴장 상태가 지속됐다. 그 후 1988년 제 6공화국 출범 직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북한을 선의의 동반자로 여기고 평화 공존 정책을 추진할 것을 선언한다. 남북 정상회담도 촉구했다. 이에 북한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남북 간의 교류도 일부 있었지만 남북 정상회담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1993년 2월 14대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제안한다. 1994년 북한도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동의, 그 해 7월 25일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남북 간에 합의하지만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1998년 ‘햇볕정책’을 선언한 김대중 정부의 출범으로 남북간에 화해 무드가 조성된다.
햇볕 정책은 초기에는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1998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하면서 남북 관계는 큰 전기를 맞는다.
오랜 기간 우여곡절을 거쳐 2000년 6월 13일 역사적인 남북 정상간의 첫 만남이 이뤄졌다.

남북 화해의 전기 마련했지만 또 다시 제자리
분단 이후 최초로 이뤄진 2000년 6월 13일 평양에서의 남북 정상 간의 만남은 세계의 주목를 받으며 남북 간 긴장 해소와 협력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 간에 한 때 화해 무드가 조성되며 통일에 대한 기대도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그 후 북한의 핵개발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천안함 사건 , 연평도 포격 사건 등 일련의 도발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남북 간 대화와 화해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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