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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왕정의 전제(專制)성

2011-06-04

조선의 정치 제도와 사회를 되돌아보고 교훈을 새기는 시간, 지난 시간엔 경연의 의미를 알아보았는데 오늘은 조선 왕조의 성격에 대해 전주 대학교 역사 콘텐츠학과 오항녕 교수와 함께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동양 왕정의 특징으로 알려진 전제(專制)
조선의 정치하면 전제(專齊)가 떠오른다. 오로지 전, 제어할 제, 말 그대로 풀이하면 국왕 마음대로 하는 독재 정치 비슷한 느낌이 드는데 조선 왕조의 전제 정치란 과연 국왕 마음대로 휘 두르는 정치를 의미했을까?
전제 정치하면 주로 동양의 왕정에 어울린다. 서양의 왕정에 있어서는 전제적(despotic)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루이 14세 같은 인물에 대해서도 주로 봉건적(feudal)이란 표현을 쓰거나 “절대적”이란 표현을 썼다. 그런데 동양의 중국이나 조선의 국왕에게는 전제적이란 표현을 쓴다. 이와 같은 표현은 주로 서양의 학자들에게서 비롯된다. 어쩌면 왜곡된 표현일 수 있다.

유럽의 계몽주의 눈에서 본 동양의 전제 정치
헤겔은 그의“역사철학강의”에서 동양은 오직 한 사람만 자유로웠다고 표현한다. 유럽에서는 계몽주의 시대 이후 유럽을 제외한 모든 세계를 그들의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평가하는데 동양의 사상을 오리엔털리즘으로 획일적으로 평가하고 그들의 계몽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왕이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동양의 정치를 빗대어 전제주의로 표현하는데 이런 표현에는 왜곡된 부분이 있다.
헤겔은 동양에서는 한 사람만이 자유로웠고 그리스에서는 약간의 사람이 그리고 게르만 근대사회에 이르러서야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워졌다고 얘기하고 있다. 유럽의 “계몽 군주와 대비된 동양의 전제 군주” 이런 개념에서 조선을 포함한 동양의 모든 왕은 전제 군주로 여겨졌던 것이다.

조선의 왕은 과연 혼자 모든 권력을 행사한 것인가?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지만 지난 시간까지 살펴본 조선 시대 경연의 모습을 봐도 왕은 늘 스스로 공부하며 닦아야하는 의무가 있었고 학자들이 왕이 무분별하게 사냥하는 것을 자제하도록 권하는 등, 수신(修身)이 왕의 중요한 덕목이자 의무였고 왕정을 행함에 있어서도 늘 좋은 가신들의 의견을 폭 넓게 듣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음을 엿 볼 수 있다. 즉 왕에겐 무소불위의 권력이 있었지만 마구 그 권력을 휘두르지 않도록 스스로 삼감이 있었고 학자들과 신하들의 간언에도 귀 기울이며 잘못된 권력 행사에 대한 경계가 있어 독재적인 왕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경연에 나타난 왕의 수신(修身)
조선 시대 정종 때 기록된 경연의 일면을 살펴봄으로써 조선시대 왕의 수신(修身)에 대한 시각을 짐작해 본다.

-경연에 나아가서 임금이 말하기를
고황제가 하루에 두 번씩 조회를 보고 천하 만기(萬機)를 모두 직접 결정하였다. 그러나 영웅과 공신을 의심하고 남당이니 호당이니 하여 모두 죽였으니 해서는 아니 될일이 아니겠는가? “ 하니 지경연사 이서와 좌간의 조용 등이 대답하기를 ” 고황제가 근면하고 검소하기는 하였으나 천하의 일을 어진 신하에게 맡기지 않고 몸소 시행하니 이는 관직의 직책을 무시하여 본래 관직과 신하를 둔 취지와 다릅니다.“ 하니 임금이 ”그러하다..“ 하였다.....
“진나라 시황제가 저울과 추로 서류를 헤아리던 일(衝石程書)도 이와 비슷합니다.”하니
“그러하다” 하셨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왕은 경연 등을 통해 어진 신하들과 학자들과 모임을 갖고 다양한 현안에 대해 의견을 듣는가 하면 다른 나라의 역사를 통해서 잘못된 점을 새겨 바르게 하고 올바른 왕정을 펼치도록 노력한 흔적들이 보인다. 위의 경연에서 언급하는 고황제란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朱元璋)이다. 명의 태조는 검소하고 근면하기는 하나 모든일을 본인이 판단하고 행하려는 품성 때문에 폐해를 가져 왔는데 바로 전제 정치의 폐단을 보인 것이다. 신하들의 직책을 정하고 직분에 따라 각 관직의 신하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왕의 권력 집중의 폐단을 막는 장치인 것인데 그렇지 못했음을 비판하고 있다.

글씨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또 다른 경연의 기록을 보면 왕자들의 글씨가 좋았다는 한 신하의 말에 정종은 글씨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부분이 있다. 경연에서 임금은 단지 신하나 학자들의 말을 경청하지만 않고 때론 본인의 의견을 밝히고 신하들에게 교훈을 주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 경연은 임금의 자기 수양과 정책 논의를 위해 계속되었고 이 경연을 임금들은 자기 수양의 장으로 삼아 열심히 가신들의 충언을 듣고 공부하며 군주로서의 자질을 쌓아간다.

조선시대의 전제주의는 유럽의 시각에서 나온 표현 그 자체처럼 군주의 권력 남용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조선의 왕들 대부분은 경연이라는 의견 수렴, 수신의 장을 마련해 놓고 소통의 정치, 상생의 정치를 추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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