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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의 여진 정벌

2014-06-14

고려는 거란족과의 전쟁이 끝난 1019년부터 약 100년 간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여진족의 세력이 막강해지면서 금나라를 건국할 무렵, 고려는 그간의 평화를 깨고 두 차례 여진 정벌에 나선다. 고려의 여진 정벌 당시의 상황과 배경에 대해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종기 교수와 함께 알아본다.

숙종, 예종 때 두 차례 여진 정벌 나서고려는 1090년 숙종 때 그리고 그의 아들 예종 때인 1107년 두차례 여진 정벌에 나선다. 한국의 역사상 주로 침략을 당해왔는데 스스로 다른 민족을 침공한 대표적인 사례다.
두 차례의 여진 정벌은 실패로 끝났다. 당시 상황은 여진족은 이미 막강한 세력을 갖추고 금나라를 건국할 준비를 끝낸 상황이므로 고려가 여진족을 침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거란은 이미 기마병이 있었고 고려는 보병 위주였기 때문에 전력상으로도 여진이 앞서있었다.

왕권 강화 위한 부국강병숙종, 예종 때의 여진 정벌은 반드시 여진족을 침공해 승리를 거두려는 목적보다는 왕권을 강화하고 당시 주도 세력이었던 문벌 귀족들을 견제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이런 여진 정벌에 대해 당시 문벌 귀족들은 반발했고 민심이 이반돼 패배는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왕권 강화 등 새로운 정치의 계기비록 실패는 했지만 고려의 여진 정벌은 정치적 의미가 크다. 왕이 직접 나서서 부국강병을 추진하므로써 왕권이 강화된 측면이 있다.
당시 송나라에서는 왕안석이 제안한 ‘신법’으로 정치 쇄신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고려도 송나라에서 도입한 화폐제도를 실실해 국왕이 국가유통권을 장악하고 또 거란 정벌에 나서는 등 주도적으로 국가의 주요 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신법’ 이라고 한다.

고려, 동아시아 주도권 회복 추진고려의 거란 정복 시도는 단순히 고려와 거란 관계로 볼 수는 없다. 당시 상황은 거란이 쇠퇴하고 송나라는 국론이 분열돼 있었다.
반면에 여진족은 세력을 키우며 금나라 건국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 틈을 타 고려는 다시 동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움직임으로 여진족 정벌에 나선 것으로 분석된다. 나라간의 전쟁은 단순히 한 가지 사건으로 평가하기 힘들고 다양하고 복잡한 주변 정세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려의 여진 정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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