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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훈요십조 위작 설

2014-10-25

태조 왕건이 죽기 한 달 전인 943년 4월에 후손들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교훈으로 10가지 원칙을 저술한 ‘훈요십조’에 대한 위작 설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훈요십조 위작 설의 배경과 진위에 대해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종기 교수와 함께 알아본다.

왕건 이후 고려의 헌법 같은 역할왕건 사망 이후 훈요십조는 고려의 헌법 같은 역할로 왕들이 주요 정책을 결정할 때 훈요십조 강령들을 반영해왔다.
이런 훈요십조가 위작됐다면 고려 역사 자체가 흔들리는 일로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위작 설은 주로 일본 식민지 사학자들이 주장하고 있고 최근에는 서양 사학자들도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훈요십조 8조가 논란/p>훈요십조 8조에는 차령 이남과 금강 외곽의 사람들을 등용하지 말라고 돼 있다. 식민사학자들은 이는 전라도 사람들을 등용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지역은 전라도 뿐 아니라 충청도도 포함하는 지역이다. 또 훈요십조가 왕건이 지은 것이 아니라 현종의 측근인 최향이 지은 것이라는 주장도 하고 있다. 그러나 최향은 현종의 측근으로 목종으로부터 현종을 옹립하라는 명령을 받은 인물이다. 당시 훈요십조는 왕가에서 내려오는 비밀문서와 같아서 최향의 집에서 훈요십조가 발견됐다고 최향이 지은 것이라는 주장은 일리가 없다.

고려의 삼국 통일 시 저항이 심했던 지역 의미차령 이남과 금강 외곽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 후백제 지역 중심의 저항이 극렬했던 지역이다.
그러므로 왕건은 고려에 대한 원한이 많은 이 지역 사람들 등용을 삼가 하라는 원칙을 서술했다고 봄이 마땅하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 위작 설은 고려의 역사 자체를 뒤흔드는 식민사관 학자들의 그릇된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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