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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태조 왕건 사후의 ‘1治1亂’

2014-11-08

‘1治1亂’이란 말이 있다. 한 왕이 잘 다스리고 난 후에는 반드시 어지러운 혼란의 시기가 뒤 따른다는 것이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해 잘 다스리고 죽은 이후 아들 혜종이 즉위하면서 혼란이 이어졌다. 태조 사후 이후 일어난 사건들을 중심으로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종기 교수와 함께 조명한다.

후사를 잇는 것 중요시어는 왕조건 후사를 잇는 것을 매우 중요시했다. 태조 왕건은 슬하에 25 왕자와 9 공주가 있었다. 즉위하자마자 장남인 혜종을 세자로 책봉하고 후계자로 정했다. 그러나 혜종의 외가는 나주 오씨로 세력이 미약했다. 태조는 생존 시 서해 해상 세력을 이끌던 박술희와 경기도 지역 호족 세력인 왕규에게 혜종을 보필할 것을 당부했다. 혜종은 자질은 뛰어났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고 외가 세력이 미미해 즉위한 후 고려가 큰 혼란에 빠졌다.

왕규의 난왕규는 경기도 출신 호족으로 두 딸을 태조의 비가 되게 하고 또 혜종에게고 다른 딸을 보냈다. 즉 태조와 혜종의 장인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왕규의 난’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왕규가 외손자를 왕으로 세우려는 목적으로 자객을 보내 잠자고 있는 혜종을 살해하려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기록에는 혜종은 왕규를 처형하지 않고 훗날 정종이 왕규를 처형했다고 나온다.

‘왕자의 난’으로 보는 시각이 많아혜종을 살해하려는 시도는 왕규가 주범이 아니라 혜종의 배다른 동생, 정종, 광종에 의한 왕자들의 갈등으로 야기된 난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 때문에 기록에는 혜종이 왕규를 처형하지 않았다고 나온다. 그리고 정종이 왕규를 처형했다고 나오는데 결국 왕자의 난을 덮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규의 난으로 몰아갔다는 분석이 일리가 있다.

‘이자겸의 난’도 왜곡 가능성
왕규의 난 이후 일어난 ‘이자겸의 난’도 왜곡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자겸은 두 딸을 예종에게 출가시키고 그 아들 인종에게도 딸을 보낸 외척 세력이다.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려다 실패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자겸은 인종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그러나 그의 권력은 단시간에 끝난다. 3개월의 권력을 누린 끝에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가장 시초가 된 원인은 인종의 이자겸 살해 시도이다. 그러나 기록에는 ‘이자겸의 난’이라고 나온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고려사에는 태조가 죽은 이후 여러 가지 난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상당 부분은 사실과 다른 정황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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