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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 광종에 대한 평가

2014-11-22

고려 광종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호족들에 대한 대대적 숙청으로 공포 정치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 기록을 보고 당시 상황을 조명하면 광종이 고려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큰 것으로 보인다. 적극적인 개방 정책으로 고려 문물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광종에 대한 엇갈린 평가에 대해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종기 교수와 함께 알아본다.

최승노의 상소문에 광종 혹평역사적 기록 중에서 광종에 대한 혹평의 대표적인 것은 최승노가 쓴 ‘상소문’이다. 문벌 귀족이었던 최승노는 상소문에서 혜종, 정종, 광종이 집권하는 동안 개경과 서경의 문무 관료 절반이 정쟁으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광종 사망 직후 남은 공신들의 수가 40명 밖에 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태조 때 공신 수가 3천 명에 이르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간 수많은 공신들이 숙청됐다는 것을 암시한다.

고려 후기 역사가 이재현, 광종의 긍정적 측면 부각최승노와 달리 고려 후기 역사가 이재현은 광종 사후 약 200년 후에 쓴 고려사 중 ‘열전’에서 광종의 업적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원나라 간섭기 충선왕이 이재현에게 고려의 문물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하는데에 대한 의견을 묻자 광종이 서울에 국학을 세우고 지방에 향교, 향당을 세우는 등 교육에 힘쓴 덕이라고 답하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광종은 과감한 인재 등용과 개방 정책으로 고려의 문물 발전에 획기적 공로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외국인 인재 등용 등 과감한 정책광종은 중국의 관료 출신 쌍기를 재상에 등용하는 등 능력이 있고 어진 성품이면 다양하게 인재를 등용했다. 광종 시대에 관리로 등용된 외국인 수가 수십 명에 달한다.
역사상 외국인을 관리에 대폭적으로 등용한 사례는 광종 때가 최고였다. 광종은 태조를 도운 개국 공신들인 호족 세력들만으로 나라의 획기적 발전을 도모하기 어렵다고 보고 중국을 모델로 한 개방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과감한 인재 등용을 했다.
이 과정에서 숙청당한 호족 세력들의 반발이 극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공포 정치’라는 혹평이 역사적 평가로 남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혹평에도 불구하고 광종은 고려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린 긍정적인 업적도 재 조명돼야 한다는 시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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