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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미국이주 110주년, 브라질 이주 50주년이 되는 해인 2013년 생각난 연해주강제이주사

2013-01-05

올 2013년은 미국 이주 110주년, 브라질 이주 50주년입니다. 또 독일에 간호사와 광부가 대거 파견된 지도
50주년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민족의 해외 이주 가운데는 가슴 아픈 이야기도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1930년대에 연해주 동포가 소련 정부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것은 좀처럼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1937년 8월 21일, 소련 정부는 갑작스레 극동 지방 연해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강제이주 정책을 발표합니다.
한인들은 난데없이 날벼락을 맞은 격이 되어버렸습니다.
당시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한 연해주 일대에는 약 30만 명가량의 우리 민족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 민족이 대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입니다.
조선 말기,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면서 탐관오리가 백성들을 쥐어짰고 그 등살을 못 배겨낸 백성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갔던 것입니다.
나라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뒤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이주 대열에 동참했습니다.
그래서 간도 지방과 연해주 지방은 사실상 국외 독립운동 기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 민족의 이주는 상대국인 중국이나 소련에게는 불법적인 월경으로 비쳤습니다.
특히 소련의 스탈린 정부는 연해주 한인에 대해 곤란스러워했습니다.
일본인과 한인을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죠.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까지 일으킵니다.
유럽의 독일과는 공동방위조약을 맺었습니다.
소련은 일본이 머지않아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이고, 그때 연해주 한인이 일본에 협력할 것이라는 우려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 우려가 연해주 한인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 정책을 만들었습니다.
1937년 9월부터 11월까지 두 달 동안 무려 17만여 명의 한인이 강제로 열차에 실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낯선 땅으로 끌려갔습니다.
화물열차에 상하로 칸을 만들어 몇 가구씩 태웠는데, 가축을 싣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아무런 위생시설도, 식량도 없이 이렇게 24일 동안 기차에 실려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나갔습니다.
겨울로 접어든 11월에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황량한 벌판에 달랑 버려진 한인들은 당장 살기 위해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덤불로 지붕을 엮어 겨울을 나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또 추위와 병으로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강인했습니다.
그 척박한 당을 맨손으로 갈아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소출이 나기 시작하자 협동농장을 만들어 더욱 생산성을 높였습니다.
그래서 번듯한 집을 짓고, 학교도 세웠습니다.
현지 사람들은 우리 민족의 끈기와 부지런함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이렇게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또 다른 시련이 닥쳤습니다.
소련이 붕괴되어 버린 것입니다.
한인은 카자흐인도 우즈벡인도 아니었기에 다시 연해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다른 국가가 되어 버린 그곳으로 돌아가려니 국적 변경이라는 넘기 힘든 복잡한 절차가 가로막았습니다.
그렇다고 원래의 고향인 한국으로 가려 해도, 북한과 한국으로 갈려져 있어 그 또한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세월이 흘러 이제 한국인도, 조선인도 아닌 고려인이 된 우리 민족의 후손들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아무에게도 돌아갈 수 없는 제3의 이방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사 토막상식, 아하 그렇구나!
미주 이주 110년을 맞아 연해주 동포 강제이주에 얽힌 역사를 되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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