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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근대 교정제도의 탄생

2013-10-26

1년 중 10월에는 중요한 여러 기념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고 지나버리는 생소한 기념일도 간간이 있습니다.
오는 10월 28일이 바로 그런 날일 것 같은데요,
바로 ‘교정의 날’입니다.
전국의 교도소에서 근무하는 교정 공무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교정시설에 입소해 있는 재소자의 권익을 향상시킬 목적으로 만든 날입니다.
오늘은, 교정의 날을 계기로 우리나라 근대 교정제도의 탄생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범죄를 저질러 징역형을 선고받은 자를 구금하는 장소가 바로 교도소입니다.
근대 이전에는 옥 또는 감옥이라고 불렀지요.
조선시대에는 옥에 갇힌 죄수의 관리를 담당하는 관청으로 전옥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대 이전의 감옥과 근대의 교도소는
명칭만이 아니라 그 내용상으로도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근대 이전의 형벌에 징역형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징역형이란 범죄자를 일정한 시설에 가두어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재범을 저지르지 않도록
재교육 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학술적으로는 시설에 가두어 자유를 박탈한다는 뜻에서
자유형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자유형은 일찍이 영국에서 18세기 말부터
근대 계몽주의가 발흥하면서 함께 생겨난 개념입니다.
그 이전 시대의 형벌은 저지른 죄값에 대한 응징과
보복으로서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신체형이라고 부릅니다.
조선시대의 형벌도 기본적으로 신체형으로서 그 종류에는
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의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태형과 장형은 이른바 곤장으로서 매를 때리는 것이고,
도형은 강제노역, 유형은 먼 지방으로의 추방,
사형은 목숨을 빼앗는 것이었죠.
따라서 조선시대의 감옥은 죄인을 가두어 두되
판결을 받기 전까지 임시로 머무는 곳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현대의 구치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에 근대적 의미의 감옥이 생긴 것은
1895년 갑오개혁 때였습니다.
경성감옥이란 명칭의 이 교도소는 서대문 독립문 부근에
세웠는데 일제강점기 때 서대문 형무소로 악명을 떨쳤죠.
지금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란 명칭의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징역형 교도소로서의 경성감옥은
우리의 주체적인 노력이 아니라
친일내각이 일본으로부터 강요받은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실제 운영은 설치이념과는 다르게
이전과 같은 신체형적인 요소가 상당 부분 유지되었습니다.
이후 1910년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한국의 감옥 사무는 모두 일본식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영국 등으로부터 근대적인 교정제도를 도입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나라도 그 혜택을 받을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만약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면,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주장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한국 죄수를 일본 죄수와 동급으로
대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조선태형령’입니다.
일본에서는 신체형을 폐지하고 자유형을 도입하는 근대화를 시행하면서, 한국에서는 전근대의 신체형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법령으로 강제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죄수들은 갑오개혁 이전으로
시대를 거꾸로 돌아가 매를 맞는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태형령을 폐지한 건 3․1운동의 뜨거운 맛을 본 뒤인 1920년이었습니다.
아주 작은 근대식 제도마저도 우리 민족의 투쟁을 통해서
획득한 것이지 일본이 거저 가져다 준 것은 결코 아닙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해 물러가고,
그 해 10월 28일 일제가 맡고 있던 교정사무를 비로소
우리가 인수했습니다.
그 날을 기념해 만든 것이 바로 ‘교정의 날’입니다.

역사 토막상식, 아하 그렇구나!
잘 알려지지 않은 ‘교정의 날’을 계기로
우리나라 근대 행형제도의 출발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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