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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야스쿠니 신사란 무엇인가

2013-11-09

일본 정부가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음으로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빠지지 않는 게
관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입니다.
올 해에도 여러 장관급 각료가 참배했고,
조만간 아베 총리도 참배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습니다. 야스쿠니 신사,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수도 도쿄의 한복판에 있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규모가 작습니다.
아담하기까지 해서 봄철에 벚꽃이 만개할 때 쯤
이곳을 찾으면 그 아름다운 풍경에 감동을 받을 지경입니다. 물론 출입에 제한이 없어 누구나 방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즈넉한 야스쿠니 신사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곳에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들이
안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이 문제라면
14명의 A급 전범만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일본 국내에서는 그런 논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창건 때부터
문제를 안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야스쿠니 신사가 건립된 것은 1869년입니다.
바로 메이지 천황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던 시기였습니다. 창건 당시의 명칭은 쇼콘지 즉, 초혼사였습니다.
초혼사란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 위로하는
신사라는 뜻입니다.
이때 ‘죽은 자’란 천황을 위해 죽은 자를 가리켰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은 막부가 통치했습니다.
메이지 천황이 이름뿐인 천황에서 실질적인 통치자로
변신하려고 하자 막부를 따르던 지방 세력들이
거세게 저항했고 격심한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메이지 천황은 그들 막부 세력을 최종적으로 물리치고
천황권을 확립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 내전 과정에서 천황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신사가
바로 초혼사였던 것입니다.
사실 일본에는 오래 전부터 내전이 빈번했습니다.
그래서 각 지방마다 초혼사라는 신사를 두고
내전에서 죽어간 병사들을 모시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적군과 아군의 구별 없이 모든 전사자를 함께 모셨습니다. 그런데 메이지 천황이 세운 초혼사는 처음으로
오로지 천황을 위해 죽은 병사만 안치하고
막부군의 전사자는 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일본의 오랜 관습과 확연하게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후 일본이 군국주의로 들어서고
연이어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등에서
많은 병사들이 천황의 명을 받아 전장으로 나가 죽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졌습니다.
그리고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많은 병사가
사망합니다.
이렇게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진 전사자의 수는
무려 246만 6천 여명에 이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전사자가 모셔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천황의 명을 받고 천황의 군대의 병사로서
죽은 자여야 합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일본은 이런 원칙에 따라
태평양전쟁의 전범들도 이곳에 합사한 것입니다.
한편 2차대전 승전국인 미국은 일본이 다시는 군국주의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천황통치체제를 폐지합니다. 이에 따라 국영 신사였던 야스쿠니 신사는
일개 종교법인으로 축소되었습니다.
그리고 천황의 참배도 금기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미국의 조치는 얼마 못가
유명무실해지고 맙니다.
그 계기는 6․25전쟁이었습니다.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세력과 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일본에 대한 족쇄를 모두 풀어주고
미군을 돕도록 했습니다.
그 와중인 1952년 쇼와 천황이 슬그머니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습니다.
이후 각료들, 수상들이 기회만 되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여 우리를 비롯한
평화애호국가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역사 토막상식, 아하 그렇구나!
일본 정치인들의 반복되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계기로
야스쿠니 신사의 정체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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