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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탑의 원형

2013-12-07

지난 11월 26일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복원을 위한
착수식이 열렸습니다.
익산 미륵사지석탑은 지난 1998년 구조조사 결과
붕괴 위험이 발견됨에 따라
전면 해체작업에 들어간 바 있습니다.
무려 12년에 걸친 세심한 해체작업이 2010년에 마무리됐고, 이제 본격적으로 복원공사에 들어간 것입니다. 미륵사지석탑은 국보11호로서
대단히 귀중한 문화재로 취급받고 있는데요,
이 석탑의 어떤 점이
그토록 귀중한 대접을 받게 하고 있는 것일까요.

미륵사지석탑이 소중한 첫 번째 이유는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라는 점입니다. 그것도 건립 년대가 명확하게 백제 무왕 때인
639년으로 밝혀져 있으니 무려 1374이나 된 건축물입니다. 오래된 건축물인 만큼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상당 부분이 파손되어 총 9층 가운데 6층만 남고
그나마 완벽하게 남아 있는 부분은 2층까지 뿐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붕괴를 방지한다며
파손된 부분을 콘크리트로 보강하는 바람에
흉측한 모습을 띠게 되었습니다.
2016년 완공될 미륵사탑은 형태를 추정할 수 있는 6층까지만 복원하게 됩니다.
미륵사탑이 중요한 이유는
가장 오래되었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탑이 한국형 석탑의 기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 역사상 최초의 탑은 물론 인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불경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열반한 뒤 화장을 하고나니
무려 8섬 너 말의 사리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석가모니를 숭배하던 여덟 나라의 왕들이 몰려와서
서로 가져가려고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석가의 제자가 중재를 해서 사리를 8등분하여
균등하게 나누어주었습니다.
8명의 왕은 각자 나라로 돌아가서 커다란 무덤을 만들고
가져간 사리를 봉안하여 모셨습니다.
당시 그것을 산스크리트어로 스투파라고 불렀습니다.
나중에 이 스투파가 중국으로 전해져
한자로 탑파로 번역되었고, 그것이 줄어서 탑이 된 것입니다.
최초의 스투파는 미륵사탑과 같은 모양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인도에 남아 있는 산치대답이 그 전형입니다.
산치대탑은 커다란 봉분 모양입니다.
돌을 깎아 만든 벽돌로 반구형 봉분을 쌓고
주위에 난간을 두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벽돌로 만든 왕릉 모습과 같아 보입니다.
이후 아소카왕이 불교를 공인하고 널리 전파하면서
초기의 8개 스투파에서 석가모니 사리를 회수하여
8만 4천 개로 나누어 각지에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스투파 양식이 불교조형물로
널리 퍼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불교가 인도 대륙을 벗어나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불경 및 불상과 함께 스투파도 전해집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불경을 중국 현실에 맞게 번안했듯이,
스투파로 중국식 탑파로 모양을 변형시킵니다.
먼저 재료에서 중국에 흔한 나무와 진흙 벽돌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모양도 봉분형에서 누각 모양으로 바꿉니다.
중국인들에게는 누각이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 양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탑 모양입니다.
그런데 중국의 목탑 및 전탑이 백제에 전해지면서
또 한 번 변신합니다.
백제인들은 나무는 쉽게 불에 탄다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백제에 흔한 재료 화강암에 착안합니다.
그래서 화강암을 정으로 쪼고 갈아서
목조 누각과 똑같은 탑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륵사지 석탑입니다.
신라인들은 애초에는 중국과 똑같이 벽돌을 이용해
분황사탑을, 나무를 이용해 황룡사탑을 만들었지만,
결국 백제인들의 신기술을 이어받아 화강암으로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역사 토막상식, 아하 그렇구나!
일본인들이 훼손한지 백년 만에
제 모습으로 복원되는 미륵사지석탑을 보며
한국 탑의 원형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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