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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국사교과서가 화두가 된 새해 벽두, 돌아본120년전 갑오개력에 의한 년도표기법

2014-01-11

올해는 서력기원으로 2014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서력기원을 쓰기 시작한 것은
120년 전 갑오개력 때부터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년도를 어떻게 표시했을까요.
특히 갑오개혁 이후 국사교과서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그 교과서 속에서 년도는 어떻게 표기했을까요.
여기에는 결코 간단치 않은 문제가 걸려 있었습니다.

갑오개혁으로 근대적 교육기관을 만들면서 다른 어떤 과목보다도 중시된 과목이 국사였습니다.
내외의 어려운 정세 속에서 나라를 굳건하게 지킬 인재는 국가 인식이 필수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 국사 교과서를 편찬한 기준은
서로 상반된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임을 명시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선 왕조의 건국이념인 성리학적 의리론을
올곧게 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근대적과 전근대적인 것이 섞인 것은
당시가 전근대로부터 근대로 이행하는 과도기라는 것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중성은 년도 표기법에서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자주독립국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선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청산해야 했고

그것은 그동안 사용해오던 중국 왕조의 년호를
폐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삼국사기 이후
조선시대에 동국통감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서에서 첫머리 년도 표기는
중국 년호를 사용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중화에 대한 사대의 의리를 지킨다는
원칙 아래 이것이 엄격하게 지켜졌습니다.
그러던 것을 갑오개혁으로 완전히 폐지하고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시점을 기준으로
[개국 몇 년]이라는 표기로 통일했습니다.
반면에 성리학적 의리는 더욱 엄격하게 세웁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역사서인 왕조실록은
한 왕이 죽고 다음 왕이 즉위할 경우,
그 해의 년도 표기는 ‘죽은 왕 몇 년’으로 표기하고,
새 왕이 즉위한 다음 해부터 ‘새 왕 원년’으로 표기합니다. 즉 새 왕이 즉위한 해를 새 왕의 원년으로
표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렇게 할 경우
‘죽은 왕 몇 년’과 ‘새 왕 원년’이 겹치게 되고
이는 죽은 왕에 대한 효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리학이 받아들여지기 이전인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역사서는 이와 달라서
새 왕이 즉위하면 바로 그 해를 원년으로 삼았습니다.
갑오개혁 당시 교과서 편찬을 담당한 학부 출판국 관리들은 이것을 그냥 둘 수 없다고 보고,
조선시대와 같이 성리학적 기준으로 수정했습니다.
그 결과 새 국사 교과서에서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년도 표기가 실제 사료와 모두 1년씩 다르게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시대 세조의 년도 표기 문제였습니다.
조선시대에 반정으로 폐위된 국왕에 대해서는
성리학적 년도 표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즉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 12년은
곧 중중 원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조는 단종에게서 양위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처음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해에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고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킵니다.
말하자면 폐위된 것입니다.
따라서 세조가 죽고 세조실록을 편찬할 때
단종이 물러난 해를 곧 세조 원년으로 표기했습니다.
그런데 단종이 폐위된 지 2백여 년이 지나서
복위 조치가 내려집니다.
그렇다면 실록의 년도 표기도 바뀌어야 하지만
이미 작성된 실록을 고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오개혁 때 학부 관리들은 교과서에서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세조 시대의 년도 표기는 실록보다
1년씩 늦게 표기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 역사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국사 교과서 파동 또한
그런 점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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