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Go Top

역사

말띠해 살펴본 기마민족설 등장의 역사적 배경

2014-01-18

올해는 간지로 갑오년이어서 말띠 해입니다.
새해 들어 각종 언론에 등장한 칼럼이나 기고문에는
말띠 해인데다 우리가 원래 기마민족이어서
더욱 운수 좋은 해가 될 것이라는 덕담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기마민족이라는 주장은
언제, 누가 시작했을까요.
뜻밖에도 기마민족이라는 단어는 1948년에 일본인 학자가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런 주장이 등장했던 것일까요.

1948년에 기마민족설을 주장한 사람은 일본의 역사학자 에가미 나미오입니다. ]
그가 주장한 학설은 정확하게는
‘기마민족 일본정복설’입니다.
글자 그대로 기마민족이 일본을 정복해
천황가를 이루며 통치해왔다는 주장입니다.
그 기마민족의 정체는 일찍이 중국대륙 북방 바이칼호 부근에 정주해 있던 몽골계 민족입니다.
그들은 몽골 초원에서 유목을 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천성적으로 말을 다루는 데 능숙해서
기마민족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에가미의 주장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일본인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이른바 황국사관을 교육받아 왔습니다.
황국사관이란 태양신이 일본 영토에 내려와
천황으로 환생했고 그 천황이 단일한 가계로 통치해왔다는
만세일계 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황이 일본 땅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멀리 중국 대륙 북방에서 이주해온 정복자였다니
일본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학설이었던 것이죠.
에가미는 왜 이런 주장을 편 것일까요.
특히 그가 일본 패전 이전에 무슨 일을 했던가를 살펴보면 더욱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 정부의 문부성에 소속된
[민족연구소]에서 일하던 연구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황국사관을 이론화하는
국책연구소 소속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만세일계의 황국사관을 부정한 것은
패전 이후 전범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재빠르게 변신한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 정부가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벌이면서 아시아가 단결해야 한다는
‘대동아공영권’을 표명할 때부터
이미 그 표어에 담긴 모순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본민족이 배타적으로 우수하다는 황국사관으로는
중국, 한국, 동남아시아 민족에게
대동아공영권을 설득하기에 부적절하다는 것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그는 아시아 민족은 원래 하나의 조상을 가진 가족이었으며, 그 가족의 가장 노릇을 일본이 하고 있다는 논리를
개발해냈던 것입니다.
이런 논리에 기초해서 고고학 연구를 진행한 결과
바이칼호 부근의 고대 기마민족을 발견해냈습니다.

에가미의 주장에 따르면 그 기마민족이 남으로 이동해
한반도에 백제와 가야를 건설했고,
4세기 중반에는 가야에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이동했다는 거죠.
이들은 일본의 선주민들을 정복하고
야마토 조정을 건설했구요.
야마토 조정은 황국사관에서 천황 지배의 시초를 이룬
왕조였는데, 이를 한반도에서 건너온 기마민족이 정복해
세운 왕조로 바꾼 것입니다.
그런데 에가미는 자신의 학설을 주장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전쟁이 패전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패전 이후 군정을 실시한 미군은 군국주의의 부활을
영구히 불가능하게하기 위해 천황제 해체 작업을 합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변수가 등장합니다.
바로 중국의 공산화입니다.
중국 공산화에 직면한 미국은 반공전선의 보루로서
일본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일본 개조 작업은
일정한 수준에서 보류됩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즉 전쟁 전과 같은 천황제는 폐지되지만 변형된 천황제가 존속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정세를
에가미는 정확하게 포착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자신이 생각해 온 기마민족정복설을 제기할 기회로 활용한 것입니다.
Close

우리 사이트는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키와 다른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계속 이용함으로써 당신은 이 기술들의 사용과 우리의 정책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