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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태국 국왕의 정치적 위상

2014-02-08

최근 태국의 내정이 점점 더 복잡하게 꼬여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집권당이 실시한 총선이 반대파의 시위로
상당 지역에서 투표가 실시되지 못해,
총선을 통해 정국을 수습하려던 잉낙 친나왓 총리의 계획은 일단 장애에 부딪힌 상태로 보입니다.
태국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친정부 세력과 반정부 세력의 시위가 격화돼 정국이 계속 악화돼 왔습니다.
그런데 태국의 정국 불안을 일거에 해결할 열쇠를 쥐고 있는 단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현 태국사태를 해결할 인물은 바로 푸미폰 국왕입니다.
태국은 영국이나 일본과 같이 입헌군주국이지만,
국왕이 단지 국가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정국이 불안할 때마다 국왕이 해결사로 나서고
국왕이 제시한 해결책이 전 국민에게
권위 있게 받아들여지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지난 1980년대 후반부터 일어난 민주화운동에 대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이를 억압하자, 푸미폰 국왕이 나서서 군부를 비판하고
민주화운동 측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로서 태국 정계는 한 순간에
안정을 되찾은 적이 있습니다.

태국 국왕의 이러한 도덕적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그것은 태국의 근대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유럽 열강들의
아시아 러시가 이루어집니다.
영국과 프랑스를 필두로 독일, 러시아, 미국이 앞 다퉈
신흥 시장인 아시아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때 동남아시아 전역이
이들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말레이시아와 미얀마는 영국,
베트남, 라오스, 오늘날의 캄보디아인 크메르는 프랑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차지가 되었습니다.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지를 면한 나라가
바로 태국입니다.
대개 태국을 중심으로 서쪽은 영국이,
동쪽은 프랑스가 차지하는 형세가 되었는데요,
흔히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과 대결 덕분에
그 가운데 끼인 태국은 완충지 역할을 맡아
식민지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태국인들의 주체적인 노력 없이
단지 정세의 혜택만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태국 국왕들의 지혜로운 대처가
빛을 발했습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밀려오는 서구 열강 앞에서 고민했던
우리 조선의 고종과 비교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1826년, 태국 국왕 라마3세가 최초로
영국과 통상조약을 맺고 나라의 문을 엽니다.
그런데 이 통상조약은 우리가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과는 달리,
국가 대 국가의 평등한 조약이었습니다.
이는 라마3세가 영국이 프랑스와 경쟁 중인 것을 간파하고 협상을 유리하게 이끈 결과였습니다.

이어서 즉위한 라마4세는 즉위하기 전부터
영어와 프랑스어 습득에 열을 올렸고,
그 결과 그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영어로 편지를 주고받는 관계를 맺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당시 아시아의 국왕 가운데 유일한 경우였습니다.
그 다음에 즉위한 촐라롱콘 국왕 즉, 라마5세는
주변 국가들이 모두 서구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불행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그는 주변 정세를 적절하게 이용해
태국의 독립을 지켜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라는 뜻에서
대왕이라는 호칭이 붙었습니다.
현재의 푸미폰 국왕은 촐라롱콘 대왕의 손자입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압도적이고,
그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서 정국이 어려워질 때마다
직접 나서서 해결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최근의 정국에 대해서는
예상 밖으로 침묵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80대 후반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건강이 예전만 못하다는 관측도 있고,
워낙 현 총리 지지세력과 반대세력 사이에서
누구 손을 들어줘야 할지
섣부르게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아무튼 푸미폰 국왕이 정국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만은
틀림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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