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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간송 미술관, 창립자 전형필

2014-03-22

바로 어제 3월 21일,
서울에서 중요한 건축물 하나가 문을 열었습니다.
옛 동대문운동장 터에 5년을 들여 새로 세운 동대문디자인프라자입니다.
마치 우주선 혹은 유에프오 같은 느낌을 주는 외관부터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확 끌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건물 외관보다 개관행사로 마련된 전시회가
더욱 눈길을 끌 전망입니다.
국내 최초로 간송미술관 소장 국보급 문화재들이
전시되기 때문입니다. 간송미술관, 어떤 곳일까요.

이번 전시회 제목은
[간송문화 -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인데요,
제목에서부터 간송미술관의 자부심이 물씬 묻어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시되는 문화재 목록만 봐도
눈이 확 뜨입니다.
세종대왕이 간행한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 신윤복의 화첩인 [혜원전신첩],
우리가 고려 청자 하면 떠올리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조선을 상징하는 철화백자 등
한국을 대표하는 국보급 문화재가 즐비합니다.
이밖에도 간송미술관은 김홍도의 풍속화를 비롯한,
값을 따질 수 없는 국보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일반인들은 간송미술관의 보물들을
직접 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서울 성북동에 소재한 간송미술관은
개인의 사설미술관으로서 지난 1971년부터
봄과 가을 단 두 차례만 극히 일부 소장품을
일반에게 선보였을 뿐입니다.
해마다 이때가 되면 비좁은 간송미술관 앞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줄을 서는 진풍경을 연출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간송미술관이 그 질에 있어 국립중앙박물관을
능가하는 문화재를 소장하게 된 것은
오로지 창립자 간송 전형필의 혜안과 노력 덕분입니다.
전형필은 1906년 서울 종로 배우개의
부자집 늦둥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배우개 즉 오늘날의 동대문에서 장사를 하며
큰돈을 벌었고, 황해도와 충청도에 큰 땅을 가진
만석지기 집안을 이루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었기에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지냈습니다.
그의 운명을 결정해준 첫 번째 인연은
그가 휘문고보 시절 만난 스승 고희동이었습니다.
고희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서
한국 근대회화의 시조입니다.
전형필은 고희동을 통해 자신의 미술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하나의 인연은 독립운동가 오세창입니다.
보통학교 3학년 때 종로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를 통해
3․1운동을 체험한 전형필은 그 기억을 내내 잊지 않습니다. 그런 그에게 3․1운동의 민족대표 중 하나였던
오세창 선생과의 만남은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세창은 전형필에게 독립운동에 뛰어들 것을
권유하지 않았습니다.


전형필의 가문과 그의 그림에 대한 재능을 알아본 오세창은
그에게 우리 문화재를 일본인들의 손으로부터 지키는 것
또한 아주 중요한 독립운동일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었습니다.
이후 전형필은 넉넉한 집안의 재산을 이용해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경성구락부에서 열리는 경매에서 백자나 청자 등에
최고가를 제시해 낙찰받는 일이
일본인 골동품상들에게는 이미 유명해졌습니다.
한번은 일본에 거주하던 한 영국인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그동안 수집했던 청자 등 한국 문화재를 처분한다고 하자,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그의 소장품 일체를
인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거래를 위해 충청도 공주에 있는 2백석 지기 농장을
팔았다고 합니다.
전형필은 당시엔 교외에 해당하는 성북동 골짜기에
땅을 마련하고 집을 지어 수집한 소장품을 보관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간송미술관이 된 것입니다.
이후 역사학자 최순우와 최완수가 이곳을
한국학 연구기관으로 삼아
한국학 연구에 큰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간송 전형필은 독립운동이
총과 대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문화를 지키고 보존하는 것 또한 아주 중요한
독립운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선각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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