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Go Top

역사

정조의 사적인 편지에 묻어난 그의 성격

2014-03-29

고미술품 전문 경매사인 옥션 단이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가 한글로 쓴 친필 편지를 경매에 내놓아
세간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정조가 어린 아이인 세손 시절에 외숙모에게 보낸
문안 편지인데요,
이 시간에는 각도를 달리해서 정조가 편지를 통해 행한 정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당연히 전화나 전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요 소통수단은 편지였습니다.
그래서 국왕들도 편지를 통해 왕실친인척과 문안인사를 나누고, 정치 현안에 대해서 대신들과 편지로
의견을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편지를 많이 활용한 국왕이 바로 정조였습니다.
정조가 남긴 친필 편지 유물은 많이 남아 있는데,
최근에 발굴된 것은 심환지에게 보낸
약 350통의 편지입니다.
심환지는 당파 중에서 노론, 그 중에서도 강경보수파인
벽파에 속한 인물입니다.
일반적으로 영조와 정조는 당쟁을 혁파하기 위해
탕평책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따라서 정조가 노론 벽파인 심환지와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밀했다는 것은 의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특히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을 두고
노론에 의한 독살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어왔는데요,
심환지와 주고받은 편지로 인해
그 주장의 신빙성이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면
정조가 상당히 노회한 정치 술수를 썼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실록에 의하면 정조는
1798년 심환지를 우의정에 임명하지만
심환지는 벼슬을 거부하며
조정에 출근하지 않았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 당시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내일이나 모레 다시 사람을 보내 권유할 것인데
일단 ‘아직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라고 쓰여 있습니다.
말하자면 정조와 심환지는 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짜여진 각본대로 연출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또 1800년에는 노론 벽파로서 영의정을 지내다가 실각한
김상복에 대해 사면 조치를 내립니다.
그러자 조정의 노론 시파 대신들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립니다.
이에 대해 정조는 “경연에서도 말이 나왔는데,
상소까지 올리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라며
불쾌해 했다는 것이 실록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 상소는 정조가 직접 써서 대신들에게 올리도록
사주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져 있습니다.
이 정도면 요즘 표현으로 정치 9단은
충분히 되는 노련한 술수입니다.
흔히 정조는 학문을 사랑한 개혁군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학식이 높고 인자한 풍모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심환지 어필에서 드러나는 그의 개성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게 보입니다.
그가 조정에서 노론 벽파와 시파가 사사건건 다투는 혼란을
개탄하는 글에서는 한자로 쓰다가
갑자기 한글로 ‘뒤죽박죽’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얼마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으면 그랬을까 싶습니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편지에서 신신당부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대로 전하면 이렇습니다.
“이 편지들은 보는 즉시 찢어버리든지 세탁하든지 하라.
이러한 서찰은 경이 스스로 세탁하는가 아니면
이들을 시키는가. 처리할 방법을 듣고 싶으니
나중 편지에 반드시 언급하여 나의 의심을
풀어주기 바란다.”
어떻게 보면 쩨쩨하다고 할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쓴 것인데요,
대단한 것은 심환지가 이런 편지를 받고도
그대로 남겨 오늘에 전해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심환지는 나름으로 험한 정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보험의 하나로 편지들을 보관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심환지는 정치 9단보다도
한 수 위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Close

우리 사이트는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키와 다른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계속 이용함으로써 당신은 이 기술들의 사용과 우리의 정책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