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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태릉과 강릉에 얽힌 이야기

2014-04-12

4월에 들어서면서 그동안 개방되지 않았던 새로운 숲 산책길이 열렸습니다.
바로 서울시 공릉동에 있는 태릉에서 강릉 사이 1.8킬로미터 산책길입니다.
태릉은 잘 알려져 있지만 강릉은 낯선 능인데요,
오늘은 태릉과 강릉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조선 왕조의 수도가 서울이었던 만큼 서울 주변에는
조선 왕릉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인지도가 높은 능이라면
단연 태릉일 것입니다.
이곳에 각종 운동경기 선수들의 훈련장인 태릉선수촌이 있어서 뉴스를 통해 익히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반 시민들은 태릉이 왕의 능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태릉의 실제 주인은 왕이 아니라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의 능입니다.
대개 왕릉은 왕비릉과 합장을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문정왕후의 남편인 중종의 능인 정릉은
오늘날 강남구 삼성동 부근에 있습니다.
아버지 성종의 능인 선릉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왜 문정왕후는 중종의 능과 동떨어져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문정왕후의 남다른 성격과 정치행동 때문이었습니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세 번째 왕비였습니다.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는 중종이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을 일으키면서 폐위시킵니다.
왕비의 아버지가 중종반정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살해당하면서 역적집안으로 몰렸기 때문인데요.
중중의 두 번째 왕비는 장경왕후인데
아들을 낳고 산후증으로 죽고 맙니다.
그래서 문정왕후가 세 번째 왕비가 되었는데
그녀 역시 아들을 낳았습니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서
온갖 술수를 동원합니다.
그녀는 정치적 야욕에 불타는 여걸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중종이 죽은 뒤 왕위는 장경왕후의 아들에게
돌아가 인종으로 즉위합니다.
그런데 인종이 원래 병약해서인지,
문정왕후의 저주가 통해서인지 인종은 시름시름 앓다가
아들을 낳지도 못한 채 즉위 8개월 만에 숨을 거둡니다.
드디어 문정왕후가 바랐던 대로
그의 아들이 명종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명종의 나이는 만 11살이어서
국정을 맡기엔 너무 어렸습니다.
그러자 문정왕후는 명종의 뒤에 발을 쳐 놓고
사실상 국정을 지휘하는 이른바 수렴청정을 합니다.
그녀가 국왕의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문정왕후와 그녀의 오빠 윤원형이 한 패가 되어
을사사화를 일으키는 등 권력을 농단하여
국정이 문란해집니다.
국정의 문란은 탐관오리의 발호를 가져오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농민들이 지게 됩니다.
조선시대의 유명한 도적 임꺽정이 활약하는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명종이 나이 스무 살이 되자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횡포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명종이 말을 듣지 않으면 불러다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벌을 주는 행패까지 부리면서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반면에 명종은 성격이 유약해서
어머니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중종의 능 정릉은 원래 장경왕후의 능과 함께
오늘날 고양시 원당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정왕후는 남편이 죽어서도 장경왕후와
함께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종 무덤을
성종의 능인 선릉 옆으로 옮긴 것입니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죽어서 정릉에 합장되기를
바랐을 것이지만, 육신이 죽은 뒤에도
권력이 살아 있을 수는 없는 법,
못된 왕비이자 대비인 문정왕후는 남편의 곁에 묻히지
못하고 홀로 오늘날의 태릉에 잠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에 대한 집착만은 죽어서도 통했는지,
명종의 능 강릉은 태능의 뒤편에
사람들의 눈에 잘 안 띠는 곳에 마련돼
죽어서도 어머니의 치맛폭에 휩싸인 형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강릉이 개방된다고 하니
명종의 한이 5백년 만에 풀리게 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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