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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어버이와 스승 사이에서 고민한 조선시대 유학자 윤증

2014-05-17

5월은 연중 가장 기념일이 많은 달인데요.
무엇보다도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이
가장 분부한 날이었을 듯합니다.
어버이와 스승, 모두 소중하게 받들어야 할 분들입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군사부일체를 삶의 덕목으로 삼았으므로 더욱 그랬겠죠.
그런데 어버이와 스승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한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조선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사례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소개해 드릴 사례의 주인공은 윤증입니다.
윤증은 17세기 후반에 활약한 유학자로서
서인 당파에서 소론 분파를 이끌어낸 소론의 영수였습니다.
그런데 윤증의 아버지는 인조와 효종 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 윤선거이고,
스승은 아버지와 함께 조선 성리학의 거봉이었던
송시열이었습니다.
윤선거와 송시열은 처음엔 서로 친분이 두터웠었고
윤증으로서는 훌륭한 두 분을 아버지와 스승으로 두었으니
행복한 아들이자 제자였습니다.
문제는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일어납니다.

병자호란 때 윤선거는 강경한 성리학자로서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청에 대해서는 배척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그 결과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지만,
다른 왕족과 대신들은 강화도로 들어갔습니다.
강화도가 안전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청군은 해전에 능한 명의 포로들로 수군을 구성하여
공격해왔습니다.
이때 윤선거는 청이 강화도성을 점령할 경우
구차하게 사느니 아내와 자식들을 죽이고
자결하기로 몇몇 지인들과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도성이 함락되자
약속한 지인들은 약속대로 했으나
윤선거는 아내는 자결하게 한 뒤
자신은 노비의 옷으로 변장해 탈출했습니다.
성리학자로서의 품위를 헌신짝처럼 내던진 것이었습니다.
이후 윤선거는 자신의 처신을 부끄러워하여
어떠한 관직에도 나가지 않고 은둔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송시열은 윤선거의 행동에 대해
비판을 그치지 않았고 둘 사이의 관계도 멀어집니다.
이렇게 되자 송시열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던 윤증은
처신이 어렵게 됐습니다.
성리학에서 군사부 일체 즉, 군주와 스승과 어버이는
하나라고 했는데 어버이와 스승 사이가 벌어지니
어버이에 대한 효를 택해야 할지
스승에 대한 경을 택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를 가르는 결정적인 사건은
윤선거가 죽고 나서였습니다.
윤증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당시 관습에 따라
아버지의 행장과 묘갈명을 저명한 유학자에게 부탁합니다. 묘갈명은 무덤 앞에 세울 비석에
고인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글을 말합니다.
당연히 최고의 유학자 송시열이
묘갈명을 써주었으면 하는 것이 윤증의 바람이었죠.
그러나 송시열은 윤선거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좋은 말만 써줄 생각은 없었습니다.
박세채가 좋게 써준 행장을 그대로 인용한 뒤
‘술이부작’이라는 문장을 붙였습니다.
인용은 하되 자신이 쓴 글은 아니라는 뜻이었죠.
이는 윤선거를 못마땅하게 여긴 송시열의 뜻을
내비친 것이었습니다.
이에 윤증은 여러 해에 걸쳐 스승에게
묘갈명을 다시 써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끝내 송시열은 이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윤증은 스승을 적대하기 시작합니다.
나중엔 서로 막말을 해댈 정도로 막장까지 치닫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회덕에 살던 송시열과 논산 니산에 살던
윤증 사이의 싸움이라 하여
이를 ‘회니시비’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결국 윤증은 스승이 속한 서인 당파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계파를 이룹니다.
스승이 늙었으니 노론이 되고, 제자는 소론이 되었습니다.
결국 윤증은 어버이와 스승 사이에서 어버이를
즉, 경보다는 효를 택했습니다.
아마도 유학의 가장 밑바닥 근본은 효에 있다는 것이
윤증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경우를 당하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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