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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우리나라 지방자체제도의 역사

2014-06-07

고국에서는 지난 6월 4일 전국적으로 지방자치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앞으로 4년 동안 우리 곁에서 살림을 챙길 시장과 군수, 그리고 시도의원과 구군의원이 선출됐습니다.
부디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정책들을 충실하게 실천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흔히 이러한 지방자치제도는 서구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현재의 지방자치제도가 서구로부터 받아들인 근대문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 속에서 이미 지방자치의 전통은
존재해 왔습니다.
우리의 역대 왕조 중에서 지방자치를 가장 중시한 왕조는
고려입니다.
우리가 요즘 역사프리즘 코너에서 살펴보고 있듯이,
고려 왕조는 애초부터 지방 세력인 호족들을 기반으로
탄생한 호족연합 정권이었습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이러한 호족 중 유력한 자에게
자기 지방에 태한 통치권을 위임해 주었습니다.
그것을 사심관제도라고 불렀습니다.
이를테면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항복해오자
왕건은 그를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해
그 지역을 다스리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심관이 중앙정부의 규제에서 벗어나
전횡과 독주를 일삼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견제책으로 만든 것이 기인제도입니다.
사심관의 자제를 수도 개경에 머물게 해서
마치 인질과 같은 효과를 노린 것입니다.
하지만 개경에 머무는 호족의 자제들은
구금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최고의 학부에서 공부하며 선진 문물을 습득하고,
나아가 중앙 정계의 거물들과 교류할 기회도 얻었습니다.
따라서 호족들은 개경에 자제를 보내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고려는 사심관제도와 기인제도를 통해
위임과 견제를 적절하게 구사하는
고려 나름의 지방자치제를 실시했습니다.
흔히 조선 왕조는 고려에 비해
중앙집권화가 강화된 체제여서
지방자치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 시대에 전국 8도의 장관 관찰사,
그리고 군현의 장인 수령을 모두 중앙에서 파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말단 지방관인 수령은 자의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습니다.
군현 단위에는 그 지역 유학자들로 구성된 향회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향회가 그 지방 주민들의 의견을 모으는,
말하자면 민회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이 향회는 상근하는 집행부로 유향소라는 것을 두어
일상적으로 주민자치를 수행했습니다.
수령들은 이러한 향회와 유향소의 협조 없이는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향회와 유향소의 전통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동학농민운동 세력이 설치한 집강소였습니다.
집강소는 프랑스 대혁명기에 등장했던 파리코뮨과 같이
동학세력이 지방을 직접 운영하는 자치정부와 같았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향회의 전통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근대에 접어들어 갑오개혁과 광무개혁 등
일련의 근대화 개혁 속에서도
이러한 향회를 법제화해서
전통을 살리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 노력을 중단시킨 것이 바로 일제입니다.
일제는 향회의 전통을 무시하고,
한국인에게 자치권을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겨우 도평의회나 군협의회에
한국인의 참여를 허락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은 향회에 비해
턱없이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해방을 맞이했지만 우리 정치가 독재와 전쟁으로
얼룩지는 바람에 지방자치가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를 이룬 뒤에 비로소
지방자치를 펼칠 기회를 잡았고,
1991년부터 오늘 우리가 누리는
지방자치를 실시하게 됐습니다.
지방자치, 짧게 보면 이제 20여년의 역사지만,
길게 보면 천년의 전통을 가진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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