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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2014-07-05

오는 8월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를 방문합니다. 천주교 신자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교황을 뵐 수 있는 기회에 들떠 있는 듯합니다.
특히 광화문 광장에서 20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순교자 124명에 대한 시복식이 열린다고 합니다.
순교자 124명 가운데 맨 위에 올라 있는 사람은 윤지충입니다. 윤지충,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윤지충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그는 1759년 전라도 진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산은 당시 전라도에 속했지만,
현재는 충청남도 금산군에 속해 있습니다.
그는 평범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다른 청년들과 다름없이 나이 스무 살이 넘자 과거 시험을 봐서 합격합니다.
이때까지는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평범한 청년이었던 그가 천주교를 접하고 나서
큰 사건을 일으킵니다.
진산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해서 당시엔
진산사건이라고 불렀습니다.
진산사건은 조선 전체를 뒤흔든 대사건이었는데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윤지충이 청년기를 보낸 때는 정조가 탕평책을 실시하며
개혁정책을 펴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결코 살기 좋았던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정조가 탕평책을 편 것 자체가
당쟁의 폐해가 극심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죠.
그래서 정약용 같은 실학자들이 기존의 성리학으로는
나라를 되살릴 수 없다고 보고
새로 밀려들어 오는 서양 학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서학의 핵심은 바로 천주교였습니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윤지충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자 이승훈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소개받고 단번에 빠져듭니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어머니 그리고 일가친척들까지 포교해
일가족이 천주교 집안이 됩니다.
그때까지 서학이라고 불리던 천주교는
조선 사회와 크게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790년 중국에 새로 부임해온 주베아 주교가
교리를 보수적으로 해석하면서 문제의 발단이 됩니다. 즉 주베아 주교는 전통 제사를 용인해 오던 이제까지와는
달리, 제사가 우상숭배라며 이를 금지하는
교칙을 내린 것입니다.
대부분의 조선 천주교 신자들은
주베아의 교칙을 전해 듣고도 이를 지키지 않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윤지충은 주교의 지침은 곧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포교한 사촌 권상연과 함께
집안 사당에 모셔뒀던 조상의 신주들을 모조리 불태워
없앱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이가 몇몇 일가친척뿐이어서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문제가 불거진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때였습니다.
윤지충은 전통적인 상례로 어머니의 상을 치르지 않고
미사로 대신했습니다.


그러자 진산 일대에 그 소문이 널리 퍼져나갔고,
윤지충은 조상도 몰라보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것은 국왕 정조에게까지 보고가 되었고,
보수적인 성리학에 물든 대신들을 격노케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정조의 탕평책에 기가 눌려 있던 대신들은
이때다 싶어 정조가 정약용 같은 친 천주교 분자들을
총애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정조는 어쩔 수 없이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하도록 했습니다.
전주 감영에 수감돼 있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목이 잘리는 처형의 순간에도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며 당당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목이 잘리는 순간에도
신음 소리 한 마디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처형당한 장소가 바로 오늘날 전주 시내 한옥마을
부근에 있는 전동성당입니다.
천주교는 수많은 순교자의 피를 생명수로 삼아
성장한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그 생명수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윤지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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