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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슬람 역사속의 칼리프 제도

2014-07-12

최근 이라크와 시리아 일대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는
과격 이슬람 단체가
칼리프제 이슬람국가를 선언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역사책에서나 보던 단어, 칼리프가
현실 세계에 등장한 것인데요,
이슬람 역사 속에서 칼리프는 어떤 제도였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칼리프는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의 후계자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함마드가 창시한 이슬람교의 독특함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무함마드는 나이 쉰이 넘어서 이슬람교를 창시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그는 무역업을 하는 상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교를 창시한 다음에는
자신이 세운 이슬람 공동체를 이끄는
정치적 지도자 역할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고
통합된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당시 주변 국가인 비잔틴이나 페르시아가
세속권력과 종교가 엄격하게 분리돼 있던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체제였습니다.
무함마드는 정치와 종교를 아우르는 지위에 있었던 만큼
그 권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632년에 죽었을 때
누가 그의 후계자가 될 것인지를 두고
여러 파벌 간에 치열한 쟁투가 벌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각 파는 협의 끝에 무함마드를 배출한 부족인
쿠라이시족 가운데서 가장 자격이 있는 사람이
칼리프 지위를 승계하기로 합의합니다.
이에 따라 제1대 아부 바크르, 제2대 우마르,
제3대 우스만으로 칼리프 승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막강한 권력을 한 부족이 독점하는 데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결국 우스만은 암살당하고 말지만,
그의 후임 제4대 칼리프 역시
무함마드의 사촌형제인 알리에게 승계됩니다.
하지만 당시 이슬람권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던
다른 부족 지도자 무아위야가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결국 무아위야는 알리를 제거하고
자신이 제5대 칼리프가 되어 실권을 장악합니다.
무아위야는 주변을 정복하여 영토를 넓히고
이슬람 공동체를 국가체제로 탈바꿈시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슬람 최초의 왕조 우마이야입니다.
그러나 무함마드 부족은 알리를 암살한 무아위야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1대부터 4대까지의 칼리프를
정통칼리프로 부르고
그 이후는 이맘이라고 부르는
자신들만의 지도자를 선출합니다.
이로부터 이슬람교는 두 파로 분리되어
알리를 따르는 파를 시아파,
권력을 장악한 쪽을 순나파로 부르게 됩니다.
형세상 시아파가 늘 소수파를 이루었는데요,
오늘날 시아파가 다수인 국가는 이란이 대표적입니다.
한편 우마이야 왕조는 750년에 압바스에게 멸망하고
이후 이슬람 세계는 압바스 왕조가 됩니다.
이런 정치변동 속에서 아랍 세계 곳곳에서
제각기 칼리프를 자처하는 혼돈이 일어납니다.
그러다 아랍 세계 전체가 북으로부터 이주해 온 투르크족에
정복당하고 맙니다.
15세기 말에 이르면 오스만 투르크족이
오늘날의 터키,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북부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으로 성장합니다.
그런데 오스만제국 지도자는 비록 이슬람교로 개종은 했지만 감히 무함마드의 후계자 칼리프를 자처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칼리프와 구별되는 세속권력으로
술탄 제도를 만듭니다.
말하자면 이때 비로소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것입니다.
오스만제국은 오랜 기간 번성하다가
1922년에 최종적으로 몰락합니다.
오스만제국이 물러간 자리에는 제국주의적 야욕에 찬
서구 열강들이 밀어닥칩니다.
이슬람 세력은 이에 맞서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을 벌여나갑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슬람 세계의 대안은
무함마드가 다스렸던 초기 공동체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최근 뉴스에 등장한 칼리프제 이슬람국가도
바로 이런 흐름의 연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역사의 수레바퀴를
1천 5백 년 전으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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