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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조선의 비파형 동검 문화

2014-08-09

최근 강원도 춘천 의암호 중도에
테마파크 레고랜드 건설 공사를 하던 중
청동기 시대 대규모 유적지가 발굴돼 화제를 모았습니다. 유적지에서는 고인돌 유적이 많이 발굴됐는데,
그 수는 적지만 비파형 동검이 발굴돼 학계의 관심을 끌었는데요.
왜 그것이 중요한지 이번 시간에 알아보겠습니다.

비파형동검 발굴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 최초의 나라, 고조선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즉 춘천 일대에 고조선 촌락이 조성돼 있었고
이번에 그 터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니
고고학 발굴사상 획기적인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비파형 동검은 청동으로 만든 칼로
몸체 길이가 대개 30에서 50 센티미터 사이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동검은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입니다. 그런데 각 문화권마다 동검의 모양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그 형태를 기준으로 문화권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비파형동검은 그 몸체 모양이 바이올린과 비슷하게 생긴
고대 중국악기인 비파와 닮아서 한눈에 보아도 특이합니다.
이 비파형동검은 중국의 요하 유역 일대와
남만주 그리고 한반도 서북 지역에서 중남부에 걸쳐서
발굴됩니다.
말하자면 비파형동검이 발굴된 지역에
독자의 문화권이 있었다고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고조선 강역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편년 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 기록을 검토한 결과
고조선이 건국된 것은 기원전 2333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파형동검이 발굴된 토양을 조사해보면
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10세기에서 8세기 사이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고조선 사람들은 처음부터
비파형동검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기원전 10세기 무렵에 어떤 계기로
새로운 문명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그것은 기자조선의 성립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은나라가 멸망할 때
신하 중 하나인 기자가 동쪽으로 와서
기자조선을 이루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학자들은 그 기록을 믿을 증거가 부족하다면서
기자조선의 실체를 부정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이전을 전조선 이후를
후조선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이전의 고조선과 대비해서 예맥조선이라고도 부릅니다.
어떤 경우든 기원전 10세기 무렵에
고조선에 무언가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청동기 문명의 도래일 것입니다.
석기에서 청동기로의 변환은
어마어마한 문화적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고조선 사람들은 그 청동기 기술을 가지고
우리 민족 고유의 비파형동검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비파형 동검은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의 동검 문화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비파형에 비해 몸체가 날렵해서
세형동검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세형동검이 출토되는 지역은
그 영역이 훨씬 좁아집니다.
즉 한반도 일대에 국한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조선에 무언가 또 하나의 충격과 단절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시기로 보아서 그것은 아마도 위만조선의 성립으로
추정됩니다.
기원전 3세기 무렵 요하 일대는 전국7웅 가운데 하나인
연나라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연나라의 신하였던 위만이 동쪽으로 망명하여 와서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우리나라 학자들도 대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시기로 보아서 위만은 연나라로부터
철기문명을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철기는 보다 발달된 제철기술을 기반으로 합니다.
따라서 동검의 모양도 훨씬 세련되게
가공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맥락이 있기 때문에
이번 춘천 중도에서 발굴된 유적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학자는 이것은 레고랜드가 아니라
고조선랜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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