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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북한산성의 건축의 배경

2014-08-30

최근 북한산성을 보수하던 중 그 하부에 고려시대의 성벽이 발굴돼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동안 북한산성은 조선시대에 축성된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기록에 나오는 고려 시대의 중흥산성이 바로 북한산성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만큼 역사적 유래가 깊은 산성이라는 것이 밝혀진 셈인데요, 오늘은 북한산성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서울 주변에 있는 산성 가운데 우리에게 익숙한 산성은
아무래도 남한산성입니다. 병자호란 중에 인조가 피신했던 곳이고, 최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북한산성은 도성에서 더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우리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아왔습니다. 그저 도심에 가장 가까운 등산 코스로만 생각했지요.
사실 북한산성의 역사는 아주 오래됩니다. 일찍이 백제 근초 고왕이 371년에 도읍을 북한산 혹은 북한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5세기 중엽 개로왕이 북한산성에 군사 를 보내 고구려 침입을 방어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리고 6세기 중엽에는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정복하고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보면 고려가 북한산에 중흥산성을 쌓은 것도 이미
백제시대부터 존재했던 산성을 개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 니다.
말하자면 북한산성은 1600년 이상 된 유서 깊은 유적인 것 입니다.
조선 시대에 북한산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남한산성의
뼈아픈 경험을 겪고 난 뒤였습니다. 당시 인조는 원래 강화 도로 피신하려다 강물이 얼어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남한산성으로 가려면 한강을 건너야
하는데다, 장소가 비좁아 왕실과 조정이 옮겨가기에는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병자호란이 정리된 뒤 숙종 대에 들어 와서 조정에서 는 조심스럽게 새 산성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것이 조심스러 웠던 것은 청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청과의 항복 조약에 ‘성을 수리하거나 새로 쌓지 않는다’는 조항이 들 어 있었던 것이죠. 섣부르게 산성을 쌓았다가 또 다시 청의 공격을 불러들일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청으로부터 반가운 전갈이 왔습니다. 당시 청이 해안 주변에 출몰하던 해적들을 소탕했는데, 그 잔당들 이 조선으로 몰려들지 모르니 잘 방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새 산성을 쌓을 구실이 생겼던 것이죠.
숙종은 대신들로 하여금 장소를 물색하게 했는데 최종적으로 궁궐에서 가깝고, 방어에 유리한 곳으로 북한산성이 낙점되 었습니다. 그곳은 왕궁인 경복궁 뒤편의 산지입니다. 산성의 북쪽 끝은 오늘날 서울 우이동에서 오르는 백운대이고, 남쪽 끝은 경복궁 뒤편 상원봉입니다. 그리고 상원봉 북쪽 기슭 평탄한 분지에 왕궁이 옮겨갈 행궁터를 마련했습니다. 오늘 날 행궁터를 오르는 가장 가까운 길은 수유리 4․19묘지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 대동문을 통과하는 코스입니다.
숙종 37년인 1711년에 공사가 완공되어, 행궁을 비롯해
창고, 군사들의 훈련지 등을 갖춘 전시 임시수도로서의 북한 산성이 모습을 갖췄습니다. 전체 둘레는 12.7km에 북문,
대동문, 대성문, 대남문, 대서문 등 5개의 큰 성문을 포함해 14개의 성문이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나라의 주요 군부대인 금위영, 어영청, 훈련도감이 각지 성 안에 유영지를 확보해둘 정도로 군사적인 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남한 산성을 능가하는 규모였습니다.
그럼에도 북한산성이 널리 인식되지 않은 것은 실제 사용될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근대화를 이룬 서양 세력 과 일본이 몰려오던 19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더 이상 산성 방어체제는 실효성을 잃게 됩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함께 북한산성은 방치되었고, 폐허로 변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그곳은 서울시민들이 즐겨 찾는 등산로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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