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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어떻게 앙코르 와트 유적지에 북한박물관이 들어설 수 있었을까?

2014-09-13

우리나라 관광객이 많이 찾는 동남아시아 여행지로는
태국 다음으로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유적지가 꼽힙니다. 그런데 그 앙코르 유적지에
북한 박물관을 건립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앙코르 유적은 캄보디아 시엠립이란 소도시 부근 밀림 속에 위치한 옛 앙코르 왕국 유적지인데요,
어떻게 북한 박물관이 그곳에 건립될 수 있었을까요?

북한이 앙코르 유적지에 건설하고 있는 박물관의 정식명칭은 [그랜드 파노라마 박물관]이라고 합니다.
아직 개관이 되지 않아서 전시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앙코르 유적을 미술기법으로 재현한 작품을 전시하거나 혹은 우리가 익히 예상할 수 있듯이
북한의 지도자인 김일성, 김정일 등의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캄보디아는 왜 북한에게
이런 박물관 건립을 허가해 준 것일까요.
그것은 현대사 속에서 캄보디아와 북한이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캄보디아 근대사는 우리와 비슷합니다.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953년에 독립합니다.
그런데 독립국은 공화국이 아니라 식민지 이전의 체제
즉 왕국을 부활했고, 그 국왕으로 시아누크가 즉위합니다.
시아누크는 비록 왕이었지만,
국민들을 위하는 정치를 해서 지지가 높았습니다.
그러던 중 이웃나라 베트남을 미국이 폭격하면서
전쟁이 발발합니다.
시아누크는 미국을 비판하며 베트남 공산당을 지원합니다. 그러자 군부 내에서 시아누크의 반미노선에 반대하는
우익 세력 론놀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접수하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당시 시아누크는 아시아를 순방 중이었는데,
귀국할 수도 없고 갈 곳도 없는 국제미아 신세가 됩니다.
바로 이때 북한 김일성이 그들 받아들여
후하게 대접해줍니다.
일찍이 196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있었던 비동맹회의에서 자신을 적극 지지해준 데 대한 보답이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은 시아누크를 형제라고 부르며
평양 근교에 시아누크가 머물도록
대저택까지 지어주었습니다.
한때 시아누크궁이라고 불렸던 이 건물은
지금도 장수원궁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편 캄보디아 국내에서 공산당 세력은
론놀 군사정부에 대해 무장투쟁을 전개합니다.
마침내 1975년 폴 포트가 이끄는 캄보디아 공산당 세력
즉 크메르 루즈가 론놀 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합니다.
북한에 머물던 시아누크 국왕은
크메르 루즈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귀국합니다.
하지만 크메르 루즈가 장악한 권력에서
시아누크가 차지할 공간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다 1979년 폴 포트 정권이
베트남의 침공을 받아 몰락합니다.
이때 크메르 루즈는 집권 기간 동안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며 수백만 명의 반당분자들을 학살한 것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 학살을 고발한 영화 [킬링필드]가 전세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크메르 루즈를 지지했던 시아누크는
신변이 불안해서 국외로 망명길에 오릅니다.
이때 또 다시 김일성이 그를 받아들여줍니다.
시아누크로서는 김일성이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후 캄보디아 내정이 안정을 되찾으면서
1993년에 다시 귀국하여 입헌군주국의 왕으로 복귀합니다. 그런 그였으니 이후 북한과의 국교관계를
최상급으로 다룬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캄보디아는 시아누크의 유지를 받들어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그리고 앙코르 유적이 있는
시엠립 마을에는 북한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이 있습니다.
우리 여행객에게는 평양냉면이 맛있기로 유명한데요,
미모의 북한 여성 접대원들이 서빙을 하고,
식사 도중엔 춤과 노래를 공연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다 캄보디아와 북한의 특별한 외교관계 덕분에
가능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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