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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미국 선교사들이 기초를 놓은 한국 기독교

2014-09-20

오늘 9월 20일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특별한 날입니다. 미국 선교사 알렌이 1884년 오늘,
제물포 항을 통해 입국했습니다.
알렌은 이후 의사로서 또한 정치가로서
우리나라의 근대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형성될 수 있게 한 첫 씨앗을 뿌린 이가 바로 알렌이었습니다.
알렌이 이 땅에 뿌린 그 씨앗은 어떤 종자였을까요.

근대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래된 기독교 교파는 가톨릭이었습니다.
가톨릭은 대원군 집권기에 극심한 박해를 받아 뿌리를 내리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말,
이미 개화가 대세가 된 이후에 들어온 개신교는
별다른 박해 없이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고종을 비롯해 개화파 관료들의 비호를 받으며 특권을 누리기까지 했습니다.
특히 알렌 입국 이후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등
미국 출신 선교사들이 대거 들어옵니다.
1927년의 통계를 보면 국내에서 활동하는 선교사 485 명
가운데 캐나다와 호주 출신 82명을 제외한 전부가
미국 교단 소속이었습니다.
한국의 개신교는 전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수입되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은 주로 장로교와 감리교 계통에
속해 있었는데, 그들이 품고 있던 신앙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미국의 초기 이민자들은 청교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이유가 자신들이 믿는
청교도 신앙에 대한 박해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남북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국인들은
청교도가 국교라고 믿을 정도로 신앙심이 강했습니다.
그리고 청교도들은 낯선 신대륙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욕망은 극도로 절제하는 생활태도를 신조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신앙 태도를 경건주의라고 부릅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금주와 금연을
기독교인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가르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건주의 신앙은
미국이 남북전쟁 이후 경제, 특히 공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대도시가 형성되고,
경제적 풍요 속에 온갖 욕망을 자극하는 물질문명이
해일처럼 밀려왔습니다.
거기에 유럽으로부터는 발달된 근대 과학이 전해지면서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 회의하는 풍조마저
밀려들어왔습니다. 기독교에겐 중대한 위기였던 것이죠.
이러한 위기 앞에서 기독교는 두 가지 방향으로 대응합니다. 하나는 근대적 과학지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기독교 교리를 거기에 맞도록 조정하자는 것이었는데,
이를 현대주의라고 부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반대의 방향으로 근대적 과학지식을
악마의 것으로 보고, 성서에 쓰여 있는 글자 그대로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근본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온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는
대부분 근본주의 교파였습니다.
이를테면 1885년부터 1910년 사이에
한국에서 활동한 미국인 선교사 70명 가운데
맥코믹 신학교와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이 33명으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신학교가 바로 근본주의 신앙운동의 본거지였습니다.
근본주의는 오로지 성서에 쓰여진 글귀를
신앙의 토대로 삼기 때문에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둡니다. 오로지 구원을 위한 신앙활동,
특히 심야기도회나 부흥회와 같은 활동에 전념합니다.
반면에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고, 가혹한 지배를 해도
그것에 대해 저항하는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선교사 알렌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고종의 조언자이자 주한 미국 공사이기도 했던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을 성토하며
한국의 독립을 지켜주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결국 미국 정부가 정부정책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그를
본국으로 소환해 한국을 떠나게 되었죠.
그런 점에서 더욱 되돌아보게 되는 알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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