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Go Top

역사

경복궁에 얽힌 슬픈 역사

2014-09-27

무더웠던 여름이 가고 어느덧 선선한 바람이 부니 가을 문턱에 들어선 느낌입니다.
이런 계절에 딱 맞는 나들이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궁궐이죠.
때마침 지난 20일부터 문화재청이
궁중문화축전을 열고 있습니다.
‘오늘, 궁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열리는 축전은 물론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서울에 있는 주요 궁궐에서 치러지는데요, 물론 경복궁이 그 중심이겠지요?
그런데 궁궐 중의 궁궐 경복궁,
역사 속에서도 늘 그런 중심의 위상을 지녔을까요?

경복궁은 새 나라 조선이 건국된 뒤 수도의 왕궁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를 정궁 또는 법궁이라고 불렀죠. 이에 반해 국왕이 잠시 혹은 임시로 거처하는 궁을
이궁 또는 행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조선 5백년 역사에서 국왕이 가장 많이 기거했던 법궁은 경복궁이었을까요? 뜻밖에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납니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들 사이에 이른바 왕자의 난이 일어나
궁궐 안에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이성계를 이어 2대 국왕에 오른 정종은
그런 일이 일어난 경복궁에 애착이 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옛 궁궐인 개경 수창궁으로 돌아가 버리고,
그곳에서 왕의 자리마저 벗어 던져 버립니다.
이어서 동생들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3대 국왕 태종은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지만,
그 역시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았을 것만 같은 경복궁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경복궁 동쪽에 새로 궁궐을 짓고 그곳에 들어갑니다. 그곳이 창덕궁입니다.
이후 세종과 문종은 경복궁으로 돌아와 지냈지만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태종처럼 창덕궁에서 지냅니다.
이렇게 국왕이 바뀔 때마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납니다.
한양이 왜군에게 점령당하면서
경복궁도 불에 타 전소됩니다.
8년 동안의 전쟁이 끝나고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한양은 그야말로 잿더미 상태였습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국왕이 머물 궁궐을 새로 짓는 일이었죠. 물론 그 1순위는 법궁인 경복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선조가 갑자기 마음을 바꿉니다.
경복궁 중건은 중단시키고 창덕궁을 비롯한
여타 궁궐들을 지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실록에 정확하게 기록돼 있지 않지만,
아마도 선조는 국토가 거덜난 엄청난 전쟁을 맞은 경복궁에
애착이 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왕자의 난을 비롯해서 그동안 경복궁에서
흉사가 잦았던 것을 두고
풍수가들이 그 터가 흉지라고 조언을 한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임진왜란이 끝나고 경복궁은 재건축이 되지 않은 채
폐허로 버려집니다.
이후 간간이 국왕이 재건 시도를 했지만
엄청난 재정이 들어가는 사업이라
섣불리 시행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렇게 무려 270년이 흐릅니다.
조선시대를 5백년이라고 볼 때
대체로 약 60%인 3백년 동안 경복궁은
국왕이 거주하지 않거나 폐허가 된 상태로 방치됐습니다.
경복궁을 법궁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인 셈이지요.
이러한 경복궁을 재건한 이가 흥선대원군입니다.
세도정치로 나라가 혼란한 가운데
아들을 고종으로 왕위에 올린 그는
왕조 중흥의 상징으로 경복궁 중건을 시도합니다.
나라가 어려운 가운데도 막대한 재정과 인력을 투입해
무려 8년 동안의 공사 끝에 1872년에 완공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경복궁입니다.
그러나 경복궁에서의 흉사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왕비 민씨가 일본인들에게 살해 당하는
비극의 현장이 되었고,
결국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덕수궁으로 옮겨갔습니다.
이렇게 보면 과연 경복궁 터가 흉지라는 게
사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하지만 물론 풍수지리라는 것이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우리는 경복궁을 보며
우리 역사 속의 굵직한 사건들을 떠올리고 반추하게 되니
역사공부의 현장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Close

우리 사이트는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키와 다른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계속 이용함으로써 당신은 이 기술들의 사용과 우리의 정책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