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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송시열이 주도한 예송

2014-10-04

얼마전 성균관 대학교 박물관이 우암 송시열의 대자첩을 일반인에게 최초로 공개했습니다.
붓글씨 한 자의 크기가 가로 80cm, 세로 90cm나 되고
총 길이가 7m에 이르는 대형 서첩이어서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총 8자로 글은 “부귀이득 명절난보”인데요,
그 뜻은 “부귀는 얻기 쉬우나 명예와 절개는 지키기 어렵다”입니다. 송시열은 왜 이런 글귀를 남겼을까요.

송시열은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대유학자입니다.
조선시대에 성균관이나 지방 주요 서원에는 문묘를 지어 유학의 시조를 기렸는데요,
당연히 그곳에 모시는 인물은 공자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주자를 모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유학자들은 그 자리에 송시열을 송자라고 일컬으며 모실 정도였으니 그의 권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송시열은 한편으로 조선 후기 당쟁의 주인공으로,
조선을 병들게 한 공허한 명분논쟁의 주범으로
악평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는 붕당정치의 한 가운데에서 서인으로 시작해
노론으로 이어지는 주류 붕당의 인맥을 형성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주도해 조선왕조를 떠들썩하게 한 논쟁이
이른바 예송입니다.
예송이란 예를 둘러싼 소송,
구체적으로는 장례예식을 둘러싸고 붕당 간에 벌어진
당쟁을 가리킵니다.
예송은 두 차례에 걸쳐 벌어졌는데요,
첫 번제 예송은 1659년,
효종이 즉위 10년 만에 죽음으로서 촉발되었습니다.
효종이 죽을 당시 그에게는 어머니 즉
자의대비 조씨가 살아 있었습니다.
사실 그의 생모는 인렬왕후지만,
일찍 돌아가셔서 새 어머니로 들어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장례에는 상복을 입는 기간이
사람마다 정해져 있었습니다.
부모가 죽었을 때 자식은 3년 동안 상복을 입습니다.
반대로 자식이 죽었을 경우 부모는 1년 동안
상복을 입게 되어 있었습니다.
효종 장례의 경우에는 이에 따르면 자의대비는 1년 상을
지내면 됩니다.
당시 송시열이 이끄는 서인 세력이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어부사시사]로 우리에게 익숙한 윤선도를
주축으로 하는 남인 세력이 다른 주장을 내놓습니다.
유교에서 군사부는 일체이므로,
국왕은 모든 백성의 어버이와 같다,
따라서 자의대비는 효종을 자식이 아니라
어버이로 여겨야 하며
이에 따라 3년 상을 지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여기서 송시열과 윤선도의 차이는
바로 왕권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였습니다.
즉 남인 윤선도는 왕권을 절대화하려는 경향이 강했고,
서인 송시열은 국왕도 일반 선비와 같이
성리학의 예법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송시열 세력은
왕권을 얕보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죠.
어쨌든 이 첫 번째 예송에서 국왕 현종은
송시열의 손을 들어줍니다.
두 번째 예송은 그로부터 15년 뒤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죽었을 때 재발되었습니다.
이때 역시 자의대비가 살아 있었는데,
인선왕후를 며느리로 대할 것이냐, 왕비로 대할 것이냐가
논쟁의 초점이었습니다.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송시열은 며느리로 대해
9월 상을 주장했고,
남인 세력은 왕비의 예를 갖춰 1년 상을 지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국왕이 남인 측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세력은 유배를 받아
정계에서 퇴각하고 남인이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송시열은 정계에서 은퇴해 원로로서
초야에 묻혀 지냈습니다.
그런데 숙종이 희빈 장씨에게서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송시열은 이를 참지 못하고 예에 어긋난다며
상소를 올립니다.
이 일을 계기로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고,
결국 사약을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송시열이 쓴 글귀 중 “명예와 절개는 지키기 어렵다”는
표현은 이렇게 성리학적 원칙을 굽힐 줄 몰랐던
자신의 성품을 한탄한 것이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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