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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의자왕에 대한 평가

2014-10-11

최근 공주 공산성에서 백제시대의 목곽고 즉,
목제 창고가 발굴되었는데요,
그곳에서 완전한 형태의 철제 갑옷과 말에게 씌우는 갑옷인 마갑, 그리고 칼과 창 등 많은 무기류가 출토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유물들이 백제가 나당 연합군과 싸운 전투를 복원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백제가 멸망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져야 할 많은 의문점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아마도 가장 큰 논쟁점은
마지막 왕인 의자왕에 대한 평가일 것입니다.

전에 제가 이 시간을 통해 백제 멸망 시점에 낙화암에서
3천 궁녀가 목숨을 던졌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삼천궁녀 전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의자왕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의자왕은 나라를 멸망시킬 정도로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이었을까요.
의자왕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유포시킨 대표적인 사료는 바로 삼국사기의 기록입니다.
삼국사기 의자왕 조에는 그가
“궁인들과 더불어 음탕한 짓을 일삼고 쾌락에 빠져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은 백제가 멸망한 지 거의 6백년이 지난
고려시대에 작성된 것입니다.
더구나 그 기록자인 김부식은 신라를 정통으로 삼고 있던
터였기에 의자왕에 대해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백제 멸망 당시에 의자왕에 대해 기록한 사료는
남아 있지 않을까요.
있습니다.
당 나라 장군 소정방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기념으로
사비성에 있던 정림사의 5층탑에 [대당평백제국비문]을
새깁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이 비문에서는 의자왕에 대해
“직언하는 신하를 내쫓고, 요부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충신에게는 형벌을 내리고, 아부하는 자들을 총애했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요부를 불러들였다는 것은 새 왕비를 맞이한 것을
두고 한 말이므로 그가 주색에 탐닉했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실제로 당시 기록인 [일본서기]에도
“군대부인 즉 왕비가 요사하여 법도를 무시하고
국기를 문란케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기록들도 승자 혹은 제3자의 기록이므로
신빙성에 주의하여야 하지만
어쨌든 [삼국사기]에서와 같이 의자왕이
주색에 빠져 있었다고 기록한 사료는 없습니다.
오히려 [삼국사기]는 의자왕에 관한 앞 부분 묘사에서
“천성이 웅대하고 용맹하며 담대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또한 “부모를 효로 섬기고 형제와 우애로워
해동증자로 불리었다”며
최고의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의자왕의 타락에 대한 전설은
김부식이 [삼국사기] 의자왕 조 말미에 적어 넣은
몇마디로부터 비롯된 것이 확실합니다.

이후 조선시대에 유학자들은 이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의자왕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재생산합니다.
15세기 후반에 활동한 유학자 김흔이 쓴 시에
“삼천궁녀들이 모래에 몸을 맡기니”라고 표현했고
이것이 이른바 삼천궁녀 전설의 효시인데요,
김흔의 머릿속에 의자왕이 주색을 탐닉한 군주로 각인돼
있던 것 역시 [삼국사기]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보충하기 위해 편찬된 [삼국유사]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고
그 아래로 강물이 흐르는데, 전하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며
함께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하나
이는 속설의 와전이다.
의자왕은 당에서 죽은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고
말입니다.
이런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의자왕이 비록 정치를 잘못한 점은 있을지라도
여자와 술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했다는 것은
사실로 믿기 어렵습니다.
이번에 발굴된 유물들이 의자왕의 진실을 밝혀 줄
새로운 단서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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